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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귀가하는 길이 환하다. 해가 길게 머문다는 의미가 아니라 집에 뭔가 있다는 얘기다. 영국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의 대형 화집을 작정하고 샀다. 한 손으로 넘길 수 없는 크기의 화집은 매일 나를 집으로 빨리 이끈다. 어서 와, 이런 화집에 반했지? 속삭이는 소리가 사무실 책상에서도 들리는 듯하다. 이 화집은 올봄 런던 여행 중에 테이트 브린튼에서 호크니 전시를 보고 반한 그림들을, 그 감흥을 오래오래 느끼고 싶어서 꽤 비싼 값을 치르고 구입한 것이다. 해외 배송이었던 데다, 화집이 놓일 받침대도 세트로 구성되어 설치를 도와줄 사람도 방문했다. 주위에 이렇게 자랑하고 있다. 나는 매일매일 호크니 화집을 봐.

세계적인 예술서 전문 출판사인 타셴에서 출간한 화집이라지만 내가 직접 본 원화와는 확실히 다르다. 그림 크기와 부감과 붓질의 느낌 등이 같을 수야 있겠나. 그래도 내가 귀갓길을 경쾌한 마음으로 달려가 넘겨본 화집은 전시장의 그 기분과 눈으로 저장했던 그 순간들을 되새기게 도와준다.

좋은 화집이 본래 그림의 아우라를 어느 정도 보상해주듯이 요즘 흔한 출판 굿즈도 이차적인 텍스트 환기 효과를 내고 있다. 출판 일을 하면서 어떤 면에서 새롭게 고민하는 문제가 되어버린 것이 굿즈다.

비로소 굿즈 이야기를 해야겠다. 책 사면 사은품으로 따라오는 온갖 물건들. 컵과 에코백과 틴케이스와 책꽂이와 열쇠고리와 손수건과 부채와 고만고만한 것들. 도서정가제로 일정한 액수 내에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파격적인 굿즈는 나오기 어렵다. 나의 경우도 삼 년여 전부터 굿즈에 끌려 책을 주문하기도 하고 굿즈를 모으려고 구매 일정을 당기기도 했다.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란 생각이, 실제로 책값을 내며 사면서도 더 갖고 싶게 만들었다. 단순한 공장 제품이 아닌 출판 콘텐츠가 활용된 한정판 굿즈니까. 그리고 실제로도 예쁘고 독특한 그림과 타이포의 디자인 제품이니까 좋았다.

문제는 실생활에서 쓰지 않고 그냥 모셔놓는 것들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는 굿즈끼리 쓸모가 겹쳐서 쌓아두기 시작했다는 게 맞겠다.

컵만 해도 일정하게 애용하는 것이 있으니 아무리 멋진 컵이 수중에 들어와도 또 쌓아두는 셈이다. 오늘도 몇 개의 굿즈를 보고 설레고 흥분하면서 주문을 하려다가 깨달았다. 이렇게 좋은 게 좋은 것일까. 인터넷 서점도 자체 굿즈를 개발한다. 매출에 굿즈가 큰 몫을 차지한다는 분석도 나왔다.

내가 대표로 일하는 출판사도 굿즈 회의를 꽤 하는 편이다. 굿즈의 성격부터 디자인까지, 법규 한도 내에서 가격 탐색도 한다. 또 해당 책과 동떨어진 성격의 굿즈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고민을 나눈다. 책 만드는 것만큼이나 아이디어가 필요하다고나 할까. 서점과 연합해서 굿즈를 만들면 여러모로 예산 단위가 커질 수 있고 마일리지 차감도 되니까 품목 선택이 넓어지긴 했지만 언제나 궁리 중이어도 답을 못 찾을 때가 있었다.

영화 <선물 가게를 지나야 출구>가 생각난다. 미술관의 출구는 왜 항상 선물 가게를 지나도록 되어 있는가. 원화의 감동을 품고 미술관을 걸어나올 때 그 이미지를 활용한 온갖 기념 굿즈를 보면 의미 부여가 쉽기 때문이다. 원화를 소유할 수 없는 관람객에게 모든 미술관은 기념품을 안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념품이 원화를 감상했을 때 그 감흥을 불러일으킨다면 참으로 소구력 있는 제품이겠지만 원화의 아우라 없이 그저 디자인의 활용 정도로 작용한다면 서글픈 일이다. 그래서 미술 관련 기념품은 더 영리하게, 더 섬세하게 기획되고 만들어져야 한다. 기념품을 보면서 그림의 흥취를 되새김질할 정도로.

책 굿즈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이다. 책을 사고 싶은 추동력으로서 작용하는 굿즈라면 언제나 환영이다. 또 책의 콘셉트와 맥락을 함께한다면 더욱 좋은 일. 그러나 굿즈를 위한 굿즈, 마케팅하기 어려운 시대의 마케팅 수단이 되어버리면 그저 잡동사니를 양산하는 꼴이 될지도 모른다. 고백했듯이 이미 책 따로 굿즈 따로, 사용하지 않고 쌓아두기 시작했다는 사실.

책을 어떻게 만들고 독자에게 다가갈까, 그 생각만으로 하루를 보내자고 다짐할 때가 많다. 그러나 굿즈에 대한 아이디어 회의 자리에서는 왜 이토록 굿즈 생각에 에너지를 분산시키고 있단 말인가 피로감이 쌓이기도 하는 것이다. 예술 복제품이 필요한 것처럼 출판 굿즈는 꼭 필요한 것일까 늦게라도 원론적인 생각을 해본다. 나의 귀갓길을 다르게 만드는 화집이 그렇듯이 책을 읽은 감흥을 되새겨줄 굿즈란 존재하는 것일까, 고개를 저어보는 것이다.

정은숙 | 마음산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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