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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69주년 제헌절이다. 우리 헌법은 1948년 7월12일 국회를 통과하고, 5일 후인 17일에 공포되었으며, 그 헌법에 따라 약 한 달 후인 8월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어 출범했다. 헌법의 공포일인 7월17일이 ‘헌법이 제정된 날’을 뜻하는 ‘제헌절’이 된 이유다. 헌법은 국가의 기초를 설계한 문서다. 따라서 제헌절은 대한민국의 초석을 마련하고 제시한 날이 되기 때문에 국가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날이다.

제헌절을 맞아 헌법연구자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 헌법을 생각해본다. 헌법은 역사의 고비 고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왔다. 최근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 헌법과 국민의 역할도 그러했다. 살아있는 권력이 헌법에 위반되는 행위를 한 이유로 대통령직에서 파면당하는 헌정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대통령 탄핵제도를 헌법에 두고 있는 다른 외국들에서도 실제로 대통령의 탄핵 파면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민들은 이번 탄핵결정을 통해 어떤 권력도 헌법 아래에 있음을 증명해냈다. 역사적인 만장일치의 탄핵인용 결정은 8명의 헌법재판관들이 내린 것이 아니다. 촛불을 든 국민이 내린 것이며, 헌법재판관들은 그런 면에서 국민의 대리인에 불과할 뿐이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우리는 국민이 불의의 권력을 몰아낸 근거가 된 것이 다름 아닌 ‘헌법’이었음을 늘 기억해야 한다.

촛불과 대통령 탄핵은 헌법의 ‘권력제한규범성’을 극적으로 보여준 우리의 생생한 역사다. 헌법은 다른 규범들이 가지지 못하는 고유한 특성들을 지닌다. 그중 하나가 ‘수권규범성’이다. 예를 들어 우리 헌법은 입법권은 국회에, 행정권은 정부에, 사법권은 법원에 속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헌법은 국가기관들에 ‘권한을 주는 규범’인 것이다. 그런데 이 ‘수권규범성’은 동시에 ‘권력제한규범성’을 의미한다. 즉 국가기관들은 헌법규정들이 부여한 권한만 행사할 수 있고, 그 이외의 권한 행사는 제한받는 것이다. 헌법이 ‘권력제한규범’이기 때문에, 심지어 최고권력자도 헌법이 부여하지 않은 권한을 행사하면 자리에서 물러날 각오를 해야 한다. 헌법은 최고권력자까지도 통제하는 무서운 규범인 것이다.

그러면 왜 헌법이 이처럼 권력을 제한하는 무시무시한 규범이 되어야 할까? 민주국가의 주권자인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위해서다. 이를 헌법의 ‘기본권보장규범성’이라 부른다. 국민 기본권의 보장·실현은 국가권력의 통제와 제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진리를 헌법은 품고 있는 것이다. 헌법에는 국가조직의 구성과 권한에 대한 통치구조 조항들도 많이 있지만, 국민의 기본권 조항들이 통치구조 조항들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대통령권력이나 의회권력을 차지해온 정치권은 이러한 헌법을 별로 중시하지 않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이명박 정부하인 2008년에 제헌절을 공휴일에서 배제한 것만 봐도 그렇다. 제헌절은 광복절이나 개천절과 함께 5대 국경일의 하나다. 다른 국경일과 비교했을 때 역사적인 의미가 결코 작지 않은데도 공휴일에서 빠졌다. 헌법은 각종 공무원시험 시험과목이었다가 제외되기도 했다. 공무원으로 행정기술자를 뽑겠다는 것인가? 헌법을 모르는 행정공무원을 뽑아 놓고 헌법을 지키는 행정을 하라고 요구할 수 있는가? 참고로 이웃 일본에서는 공무원들의 책상 위 책꽂이에 헌법해설서가 반드시 꽂혀 있다고 한다.

정치권의 헌법 홀대는 대통령제다 의원내각제다 하는 권력구조 개헌에 골몰하는 국회의 모습에서 절정에 달한다. 지난 정권에 의해 유린된 헌법의 상처를 보듬고 치유하는 데 시간을 보내기는커녕 국정농단의 책임을 헌법에 전가하며 헌법을 개정의 대상으로 몰고 가는 국회에 든든한 지지와 박수를 보내주는 국민은 많지 않다.

결국 국민들이 헌법을 잘 알아야 한다. 그런 국민들을 키워야 한다. 그래야 헌법을 통해 그 국민들이 권력을 민주적으로 통제해 진정한 주권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개헌과 관련해서도 국민들이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 이 시점에 꼭 헌법을 개정해야 하는지, 개정한다면 무슨 조항을 삭제하고 무슨 조항을 신설하며, 어떤 조항을 다듬어야 하는지를 주권자인 국민들이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권에 맡겨둘 일이 아니다. 헌법은 권력제한규범이므로 헌법에 의해 권력 제한을 당해야 하는 정치권이 헌법개정의 주도권을 쥐는 것은 지독한 주객전도가 되기 때문이다.

정치권은 개헌을 이야기하기 전에 자신들이 헌법을 홀대하지는 않았는지, 헌법을 얼마나 잘 지키면서 권한 행사를 하려 애썼는지, 헌법정신의 구현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 정치를 했는지를 뒤돌아볼 일이다. 제헌절에 다시금 헌법을 생각한다.

임지봉 |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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