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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산책자]육필원고

opinionX 2017. 1. 16. 10:29

며칠 전 평소 왕래가 있던 노작가께서 출판사 문을 열고 깜짝 방문하셨다. 올여름 펴낼 책의 원고를 직접 들고 오신 것이다. 칠십이 넘은 노구께서 400자 원고지 10장씩을 호치키스로 찍은 묶음 200개를 부려놓더니, 역참에서 국밥 한 그릇 말아 드시듯 맛있게 점심을 드시고 다시 집필실로 돌아가셨다.

선생을 배웅하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 원고뭉치를 바라보는데 살짝 아득했다. 저걸 언제 다 치나. 200자 원고지로 거의 4000장 분량이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육필원고(肉筆原稿)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내 말이 그 말이다. 출판사 10년 경력에 원고지에 손으로 쓴 원고는 처음 받아본다. 물론 나도 20대엔 원고지에 제법 시도 써봤고 30대 초반엔 잡지 편집부에서 짧은 수고(手稿)를 컴퓨터에 옮기기도 해봤다. 그런데 그런 원고지가 어느 순간 정전처럼 뚝 끊어져 지난 10년 동안 단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오히려 놀랍기도 했다.

하여간 저걸 입력하려면 편집부 직원 두 명이 한 달은 매달려야 할 것 같다. 한말과 일제강점기가 배경인 데다 양반들 사이의 듣도 보도 못한 문어체와 단어가 줄줄이고, 한글에도 초서체가 있나 싶게 흘려서 쓴 글씨며, 문장은 소설가 박상륭 저리 가라 할 만연체다. 자체 교정을 한차례 본 초고라 만년필로 쓴 원본에 빨간색 볼펜으로 깨알같이 보강한 내용도 만만찮다.

‘입력요원’으로 선발된 두 직원과 함께 만지작만지작 넘겨보다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내가 죄인일세” 표정을 짓고 말았다. 결국 일말의 양심이 움직여 나 또한 입력요원을 자처하고 말았고, 그렇게 3인조로 팀이 꾸려지게 되었다.

시작이 반이라고 한 뭉치를 놓고 당장 입력을 시작했다. 젊은 직원들에게 모범을 보이고픈 약간의 조바심을 안고 검은 지렁이 같은 글씨체를 눈으로 따라가는데 첫 문장부터 탁 막히고 말았다. 글자 하나가 ‘타’인지 ‘하’인지 ‘라’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거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비워두고 다음과 다음 문장은 무사히 넘어갔는데 그 뒤에서 또 막혔다. 이번에는 ‘몰’인지 ‘돌’인지 ‘불’인지 헷갈린다. 대체 이게 뭘까 머리를 쥐어뜯는 사이 어느덧 2시간이나 흘러가 버렸다. 그런데 이상하지, 막힌 글자는 결국 알아내지 못했지만 마음은 왠지 상쾌하고 재미난 놀이라도 하고 난 기분이었다. 언감생심 바빠 죽겠는데 한 뭉치를 더 해보고 싶어 내처 작업에 들어갔는데 이제는 서서히 줄거리의 서막이 오르고 화자의 출생 비밀이 드러나고 그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지기까지 한다. 이거 큰일이네. 드라마 몰아보기 하는 심정으로 다시 세 번째 뭉치를 입력하고 나니 머리가 띵한 것이 퇴근시간이 돼버리고 말았다.

이건 늦게 배운 도둑질이 날 새는 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뭔가 싶어 약간 멍했다. 새삼 반성도 뒤따랐는데 한 줌의 텍스트를 만들어내는 데도 이리 오래 걸리거늘 그간 얼마나 많은 원고를 수박에 줄 긋듯이 읽어왔던 것일까, 뭐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육필원고는 특히 악필원고는 속도내기가 원천적으로 차단돼 있다. 알아먹기가 힘들어 받아쓰기도 힘들지만 더욱 큰 장애물은 자꾸 작가가 보인다는 것이다. 왜 이 문장은 지우고 다시 썼을까, 아 이런 것을 강조하고 싶으셨구나, 한글 자모를 독특하게 이런 스타일로 쓰시는구나 등 문체를 넘어 서체까지 감상하느라 무아지경이다. 새삼 왜 육필원고라고 부르는지 알 것 같은 심정이 됐다.

미디어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 ‘종이’라는 물건이야말로 경탄스럽기가 그지없다. 흔적이 고스란히 남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까마득한 과거, 동물의 뼈나 돌에 글자를 새길 때는 고쳐쓰기가 가능할 수가 없었고 피륙에 쓸 때도 이런 조건은 변함이 없었다. 재료의 희소성 때문에 그들은 완제품으로만 존재했다. 그런데 종이는 달랐다. 이른바 초고의 개념이 가능해진 것이다. 작가가 쓰고 지우고 고치고 보태는 것이 자유자재로 이뤄지고 그 시간의 층위가 그대로 노출되어 편집자에게 전달된다. 미디어 혁명으로 컴퓨터가 나오자 다시 이 흔적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다시금 문자적 창조는 그 잉태의 흔적을 지운 채 완제품으로만 읽히는 운명이 돼버린 것이다. 따라서 작가의 숨결에 눅은 육필원고란 종이에(이왕이면 원고지에) 이런 방식으로 구현된 것일 수밖에 없고 나는 그 창조의 순간이 남긴 흔적을 더듬으며 제 코가 석자인 줄도 모르고 흥분을 느꼈던 것이다. 물론 저걸 다 입력하면 그 흥분은 늙어버리겠지.

그나저나 아날로그의 선별적 귀환이 횡행하는 이 시대에 원고지에 글 쓰는 취미는 갱생될 가능성이 없는 것일까?

강성민 | 글항아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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