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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산책자]저자를 팝니다

opinionX 2017. 8. 14. 10:21

“어머니는 3남2녀를 얻었고, 나는 그 2남에 해당한다. 다른 형제는 각각 아내를 얻고 시집을 가, 남은 어머니와 나의 생활이 시작된 지 벌써 20년 이상이다. 독신자인 내 집이 지내기 편한 건지 아직도 내게서 눈을 뗄 수 없는 건지 그것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느긋하게 둘이서 지내고 있다.” 팩트에 기반을 둔 담백한 문장. 이 산문을 누가 쓴 건지 알 수 없다면, 흠뻑 빠지기 어려운 듯한 내용이다. 그래서?라고 심상하게 물을 수도 있는 이야기. 만약 옆집 아저씨가 메모 삼아 건네준 것이라면 단순한 정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 유명한 소설가의 소설 첫 단락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전개가 기대된다.

매일 변함없이 투고되는 원고들을 보면서, 책으로 만들고 싶은 건 따로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다. 같은 문장,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쳐도, 베껴 쓰지 않는 이상 그럴 리 만무하지만, 과연 누가 썼는가, 저자의 고유성이 글의 해석을 달리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저자 이름을 가리고 원고만 봐야 한다는 말은 책 만들면서 해당되지 않는 사항. 문학상 심사에서는 당연히 그래야 하겠지만 출판 행위에서 저자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누가 썼느냐가 한마디로 만들고 싶은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것이다.

출판사에는 매일같이 원고가 투고된다. 육필 원고를 들고 오는 사람은 이제 없다. 십여년 전만 해도 보자기에 육필 원고지를 고이 싸서 들고 오는 사람도 있었다. 곧바로 글쓴 사람과 대면하는 것이다. 이제는 메일로 원고 파일이 전달된다. 투고된 원고 장르는 몇 가지 유형이 있다. 문학서에 해당하는 소설, 시, 산문들. 읽으면 누구에게나 도움된다는 정보형 자기계발서. 인문서나 사회과학서 원고도 드물게 투고되지만 이 장르의 원고 검토는 생각보다 쉽다. 인문서나 사회과학서는 지식을 전달하는 책이니까 저자의 전공, 전문성을 먼저 보면 금세 출간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 가장 아리송한 것은 문학성을 추구하는 원고들. 에피소드가 비현실적으로 재밌거나 문장력이 뛰어나면 반가우면서도 검증이 필요하다. 직접 창작한 것일까. 검토자가 모르는 많은 책들의 조합은 아닐까 하고 조심스레 의구심을 갖고 투고자에게 연락해보는 것이다.

원고 첫 장부터 비문이 흔하다면 읽기를 멈춘다. 기본기가 되어 있지 않은 원고는 더 읽어도 출간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출판사에서 두 손 들어 환영하는 투고 원고는 내용이 좋은 데다가 투고자가 무슨 책을 내고 싶은지 정확히 드러나는 유형이다. 아낌없이 자신의 핵심 역량을 발휘하고 그 저자만이 쓸 수 있는 고유성을 갖고 있는 것. 저자의 이력과 집필 의도가 책을 빛낼 만한 것. 이런 투고 원고가 드물다는 게 아쉽지만 메시지가 아무리 좋고 문장이 정확하게 씌어졌다 해도 저자의 고유성이 드러나지 않는 원고는 책으로 펴냈을 때 독자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출간된 거의 모든 책들은 메시지가 좋고 읽으면 득이 되는 것 아닌가. 문제는 지갑을 열고 살 것인가 숙고해야 하는 것이다. 다 읽고 사는 독자는 없기 때문에.

대부분 독자는 저자 이름과 제목만을 확인하고 책을 구입한다. 이 현상이 투고 원고를 검토할 때 그대로 적용된다. 그러니 왜 이미 출간된 책들보다 훨씬 내용이 알차고 인생을 걸고 쓴 역작인데 책으로 내려고 하지 않느냐고 따져 묻는 것은 ‘저자의 고유성’ 부분을 간과한 셈이다. 왜 자신의 책을 독자들이 읽어야 하는지 스스로 되물어야 한다. 저자를 매력적으로, 유용한 콘텐츠를 갖고 있는 사람으로 인지한 독자는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그의 신간을 따라 읽을 가능성이 높다.

이 글의 맨 앞에 인용한 글은, 세계적인 영화감독 오즈 야스지로의 고백이다. 나는 이 고백을 듣고 이후 그의 영화를 다시 되새김질했고, 모든 원고를 찾아 읽고 싶어졌다. 평생 독신인 감독과 늙어가는 어머니 이야기가 그의 영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새삼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글을 읽고 누군가 물을 수 있겠다. “그럼 왜 당신은 <마음산책X>를 냈나요? 저자 이름을 가린 책을.” 아아, 이건 다른 문제다. 이것은 일회성 한시적인 특별 판매 행사였던 것이다. 저자의 고유성이 분명한 작품, 오히려 가리고 판매하면서 독자에게 호기심을 갖게 하려는 의도였으니까.

오늘도 투고된 원고를 보면서 저자에 대한 생각을 가다듬는다. 저자가 왜 이 책을 내야 하는지 이유가 분명해야 한다. 그래야 출간 작업을 시작할 수 있다. 미래의 저자여, 당신을 팔아야 해요. 작품의 완성도와 메시지는 독자들이 알아서 판단할 테니까요.

정은숙 | 마음산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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