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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소년과 금붕어가 집중력 시합을 하면 누가 이길까. 2015년 마이크로소프트사가 밀레니엄 세대 2000명을 대상으로 흥미로운 연구를 진행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디지털 원주민이 어항 속 물고기보다 집중력이 떨어졌다. 미국 청소년이 집중하는 시간은 평균 8초에 불과했다. 산만하기로 유명한 금붕어의 집중 시간 9초보다 짧은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8월11일 오후, 경희대 청운관. 최근 <4차 산업혁명, 교육이 희망이다>를 펴낸 류태호 교수(미국 버지니아주립대)가 특강에서 소개한 내용이다. 청중들이 당혹스러운 기색을 보이자 류 교수의 말이 빨라졌다. 류 교수는 “밀레니엄 세대가 하나의 주제에 최대한 집중하는 시간이 90초”라며 이에 맞춘 학습 모형을 운영하면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짧은 집중 시간, 비선형적 사고를 특징으로 하는 밀레니엄 세대를 위한 학습법이 ‘마이크로 러닝’이다. 주제를 잘게 나눠 주제당 수업 시간을 90초, 길어도 4분을 넘기지 않는다. 또한 1부터 10까지 순서대로 배우지 않고 5가 궁금하면 5를, 8이 궁금할 때는 8을 공부한다. 비선형 학습이다. 마이크로 러닝은 이 외에도 자기주도 학습, 단일 주제 다적용 학습, 인터랙티브 리치 미디어(Interactive Rich Media) 학습 등으로 구성된다.
류 교수는 낡은 교수법을 폐기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가르치기만 하는 교수, 배우기만(암기만) 하는 학생. 이 안이한 구조를 타파하지 않고서는 ‘사람과 기술, 과학기술과 인문학이 조화를 이루는 융복합 시대’를 열어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류 교수는 ‘학습혁명’을 통해 비판적 사고와 창의력, 소통과 협업능력을 갖춘 미래세대, 즉 ‘새롭고 불분명한 문제’를 해결하는 인재를 키워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지 않았다간 인공지능이 지배하는 암울한 시대를 맞이할 것이라는 경고로 들렸다.
강연 내내 ‘학습’이란 단어의 노출 빈도가 압도적으로 높았다. 기왕의 ‘교육’으로는 더 이상 강의와 학교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 말 그대로 ‘교육절벽’이었다. 어떻게 해야 더 많이 가르칠까, 어떤 방법을 써야 학생들의 선형적(기승전결) 스토리텔링 역량을 높일까 고민해온 나에게 학습혁명은 상상하기 힘든 특이점처럼 보였다. ‘교육 3.0’이 요구하는 기준에 따르면 나는 ‘교육 1.0’ 시대의 적폐였다. 가벼운 현기증이 일었다.
교육 3.0은 그야말로 대전환이다. 지식, 학습, 교사, 학교의 위치와 역할이 크게 달라진다. 교육 1.0 시대의 지식은 ‘받아 적고 암기하는 것’이었다. 이런 지식이 교육 2.0 시대에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으로 변모했다가 교육 3.0 시대에는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맥락에 따라 재창조되는 것’으로 차원이 달라진다. 학습 또한 ‘선생님에게 배우는 것’에서 ‘선생님과 친구에게 배우지만 선생님도 학생에게 배우는 것’으로 변화한다. 학교는 카페, 직장, 길거리, 지하철, 여행지 등 모든 곳으로 확대된다. 교육 1.0이 고체라면 교육 3.0은 액체를 넘어 기체에 가깝다.
나는 몇 년 전부터 ‘교육에서 학습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여왔다. 그런데 막상 내가 학습의 당사자, 전환의 주체가 돼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득해진다. 기존의 관점과 태도, 방법을 다 버려야 교육 3.0에 동참할 수 있다. 교단에서 내려와야, 선생의 구태를 벗어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다는 것인데, 영 불안하다. 흉내조차 내지 못할 것 같다.
특강을 듣고 나오는 길에 교학상장(敎學相長)을 떠올렸다. 그래, 4차 산업혁명의 위세에 짓눌려 동양의 오랜 전통을 깜빡 잊은 것은 아닌가. 교학상장이란 스승과 제자가 가르치고 배우면서 함께 성장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교육 3.0의 제안과 크게 다를 바 없지 않은가. 공자 시대에 이미 스승과 제자의 바람직한 관계가 설정됐다. <예기>가 줄곧 일러왔거니와, 배워봐야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가르쳐봐야 어려움을 알 수 있으니, 모름지기 가르치고 배우면서 더불어 성장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교학상장의 전통은 지난 세기 이후 오간 데 없어졌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식민지, 해방, 분단을 거쳐 근대교육이 뿌리내린 이래 교학상장이 ‘교학상망(敎學相亡)’이 되고 말았다. 중등학교는 대학 입시를 위한 ‘학원’으로, 대학은 취업기관으로 전락했다. 공부가 시험공부로, 교육이 취업교육으로 바뀌었다. 교육과 학습은 공진화하지 못하고 서로 역진화를 거듭했다.
요즘 내 책상에는 류태호 교수의 신간 외에 두 권의 새 책이 펼쳐져 있다. 한동일 교수의 <라틴어 수업>과 강남순 교수의 <배움에 대하여>. 한 교수는 다른 사람을 이기려 하지 않고 ‘이전의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진짜 공부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강 교수는 진정한 배움은 ‘변혁적 배움’이라며 비판적 성찰을 일상화하라고 권한다. 공교롭게도 두 교수 모두 학생들과 눈높이를 맞추고 있다. 학생을 엄연한 스승으로 대한다. 교학상장의 모범이다.
대학(大學)이란 단어가 새삼스럽다. 대학은 대교(大敎)가 아니다. 가르치는 곳이 아니고 배우는 곳이다. ‘큰 배움터’다. 교수가 먼저 달라져야 한다. 교수들이 달라져서 ‘교학상망을 교학상장으로’ 되돌려놓는다면, 4차 산업혁명의 고삐를 움켜쥘 수 있을 것이다. 4차 산업 시대의 한가운데에다 인간의 온기와 생명의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 것이다.
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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