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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부터 출판사 나름의 독서 모임을 운영하기로 했다. 적잖은 회비를 내야 하고 모임을 위해 일정한 시간도 할애해야 하는 일이라서 모일 독자가 있겠는가 의구심을 갖기도 했다. 기우였다. 꽤 많은 독자가 참여를 원해서 정원을 맞추는 일이 난감할 정도였다.
저자 행사나 북페스티벌에서 독자를 만나는 일은 익숙하다. 그러나 그때 반갑게 마주친 독자라고 해도 대부분 스쳐 지나가듯 잊히곤 했다. 소셜미디어에서 책 서평을 통해 가늠하는 독자도 결국 내 상상을 통해 만나는 것이다. 서평의 질감이 만든 목소리를 상상하며 읽는다. 책을 만들면서, 콘셉트를 정하고 편집 디자인을 할 때 늘 한 사람의 가상 독자를 마주하고 작업한다. 타깃 독자가 제대로 읽어줄 설득력 있는 편집을 하기 위해서 가상의 존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책이 출간된 후 어떤 독자가 읽었을까, 판매 데이터를 가지고 실제 분석도 한다. 판매량이 많은 책은 그만큼 가상 독자의 범위를 훌쩍 벗어나 있었다. 그렇게 확산된 독자가 많은 책은 출판사에 큰 보람을 안긴다. 문제는 타깃 독자로 상정한 이마저 읽지 않는 책이 많다는 것이다.
편집자의 머릿속에서 그려낸 가상의 독자가 환상처럼 허물어지는 것을 반복하면서 목이 말랐다. 진짜 독자의 목소리, 눈빛을 느끼고 싶었다. 누가 어떻게 읽는 것일까 알고 싶었다.
잡지사 편집자들에게는 구체적으로 상이 잡히는 독자가 있다고 한다. 정기 구독자들이다. 주소와 나이와 성별이 표기된 구독 신청 정보를 보면서 잡지 성향에 맞는 독자들을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잡지가 아닌 단행본 한 권 한 권은 불특정 다수의 독자가 읽는 것이니, 왜 그 책을 손에 넣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왜 그 책을 선택했는지가 궁금하기 짝이 없다.
대부분 독자들은 저자와 제목 등의 적은 정보로 책을 선택한다. 내 경험상 출판사 브랜드를 보고 책을 구입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래서 이번 독서 모임에는 출판사 브랜드를 보고 책을 읽어달라는, 다소 실험적인 성격이 담겨 있었다.
설렘과 긴장 속에서 첫 번째 독서 모임을 진행했다. 다양한 출판사에서 출간된 특정 분야, 특정 장르의 책을 읽는 모임이 아니라 하나의 출판사, 하나의 브랜드에서 출간된 책을 읽는 모임이라서 그런 것일까. 독자들 눈빛이 닮았다. 출판사에서 나오는 책의 성격과 비슷한 모습이라고 표현하면 추상적이지만, 그 이상의 적절한 표현을 찾기 어렵다.
독서 모임을 마치고 한 독자에게 질문했다. 어떤 책을 읽을지 미리 정하지 않은 채 한 출판사의 책을 읽는다는 사실만 가지고 신뢰할 수 있었는지, 어떻게 가입하게 되었는지. 대답은 감동적이었다. “독서는 필요에 의해서 할 때도 있지만 우연한 계기나 묘한 인연으로 시작할 때도 있지요. 그렇게 읽은 책이 생활을 확 바꿀 때도 있고요. 적어도 출판사 편집자가 자신이 만든 책을 놓고 함께 읽자는데, 그 제안에 몸을 맡겨보는 것도 직접 책을 고르는 즐거움만큼 기대가 있지 않겠어요. 한 권 팔려고 출판사가 모임을 운영하는 것은 아닐 테고요.”
모임에 참여한 독자의 답이 독서의 의미를 그대로 요약한 셈이다. 우연히 읽게 된 책의 새로운 발견과 필요가 아닌 무용한 읽기의 즐거움을.
독자의 눈빛을 실제로 마주하고 싶은 출판사와 책을 우연히 만나고 싶어하는 독자가 함께하는 모임에서는 무슨 주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우선 책 내용만으로는 알 수 없는 편집의 뒷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어떤 방식으로 책의 콘셉트를 정했고 어떤 이유로 편집의 룰을 정했는지 그 제작 과정을 공유할 수 있다. 사각의 물성 바깥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새로운 지점에서 책을 이해하는 측면이 생긴다. 가령 영화의 제작시사회에 참여하면, 작품에 또 다른 흥미를 느끼게 되는 것과 같다고 할까. 또 창작 동기나 배경을 알게 되면 작품을 입체적으로 읽기가 가능해진다. 책을 더 즐기기 위해서 책의 제작 과정을 아는 것은 특별한 독서 동기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일까. 독서 모임에서 저자가 낭송한 문장이 특별하게 남는다.
“첫사랑은 두 번 다시 겪을 수 없다. 첫째도 복수형이 될 수 없다. 첫인상도 첫만남도, 첫 삽도 첫 단추도 첫머리도 두 번은 없다. 하지만 첫눈은 무한히 반복된다. 해마다 기다리고 해마다 맞이한다.”
출판이 이래서 좋다. 저 문장을 따라도, 저 문장을 반복해도 말이 된다. 첫 독자는 무한히 반복되는 첫사랑이다. 새 책이 나올 때마다 매번 첫 독자를 맞이한다. 두 번 세 번 겪을수록 진해지는 복수의 사랑. 다음번 독서 모임, 같은 독자와 다시 하는 첫사랑이 기다려진다.
<정은숙 | 마음산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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