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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기 전에 자기 몸에게 고맙다고 말하라.’ 십여년 전 틱낫한 스님의 어록에서 마주한 구절로 기억된다. 마침 몸에 대한 관심이 커지던 시기여서 스님의 권고를 따르기로 했다. 잠자리에 누워 속으로 중얼거렸다. 오늘도 집과 일터를 오가느라 고생 많았다, 고맙다, 두 발아. 두 손에 대해서도 감사를 표했다. 오늘도 만지고 가리키고 여닫고 쓰느라 수고했다, 네가 없었다면 하루 세 끼 밥을 어떻게 먹을 수 있었겠느냐. 너무 고마워서 존댓말을 쓰고 싶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내 몸에 두 손, 두 발만 있는 게 아니었다. 이목구비 외에 일일이 헤아릴 수조차 없는 기관들이 있었다. 피부와 머리카락, 세포, 혈관…. 밤을 새워도 고마움을 다 전할 수 없을 터였다. 뿐이랴, 곰곰 생각하니 고마움보다 미안한 마음이 더 들었다. 몸에게 얼마나 무심했던가. 아니, 무심한 수준을 넘어 거의 학대 수준이었다.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지 않는 것,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지 않는 것은 물론 자극적인 음식도 몸에 대한 폭력이었다. 결국 스님의 가르침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몸은 정상적일 때 보이지 않는다. 어딘가에 탈이 나야 불현듯 나타난다. 그러면 몸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후회와 자책, 반성과 각오를 거듭한다. 그러고는 또 까맣게 잊어버린다. 며칠 전, 내 몸속으로 카메라 렌즈가 들어갔다 나왔다. 대장 내시경 검사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건강검진 결과가 날아왔는데 몇 가지 지표가 ‘빨간불’이었다. 덜컹하는 마음에 가정의학과를 찾아갔더니 ‘나이가 몇인데 아직 대장 내시경을 하지 않았느냐’며 당장 예약하라는 것이었다.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거역할 수 있는 강심장이 몇이나 되랴. 나는 장 세척제를 한 아름 받아들고 병원을 나섰다.

음식도 가려야 했다. 김이나 미역, 씨앗이 있는 과일, 잡곡밥을 멀리해야 했다. 틱낫한 스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그간 내외했던 오장육부에게 고맙고 미안하다며 거듭 용서를 구했다. ‘몸의 지도’를 다시 그려나가다가 새삼 깨달았다. 내 몸에서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기관이 거의 없었으니 오장육부는 명실상부한 지방자치체였다. 서로 긴밀한 연락 체계를 갖추고 있겠지만 중앙정부, 즉 마음의 통치권 밖에서 자율적으로 움직인다. 눈, 코, 입, 귀, 손, 발도 무의식적으로 움직일 때가 훨씬 많다. 나는 내 몸의 주인이 아니었다. 마음이 몸에 세 들어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마음은 과연 내 것인가. 하나하나 파고 들어가면 마음 또한 내 것이 아니다. 나는 무수한 관계의 소산이고, 숱한 관계의 맥락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앞으로도 관계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틱낫한 스님은 “종이는 종이가 아닌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했다. 나는 나 아닌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심장이나 간이 내 몸 안에 있지만, 심장이나 간이 곧 ‘나’인 것은 아니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기억, 감각, 감정, 행위, 상상의 대상 또한 대부분 밖에 있다. 그러니 나는 무한대로 연결된 그물코 중 하나였다. 그래서 나는 소우주이기도 했다.

동식물이나 사물을 인간화하는 능력은 구석기 시대부터 전해 내려온 사회적 유전자 중 하나다. 의인화를 통해 대상과 공감하는 마음의 작용이 없었다면 인류는 벌써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가끔 ‘역의인화’를 시도한다. 대상으로 하여금 ‘나’를 자기화하도록 하는 관점의 전환. 내시경 검사를 앞두고 몸이 그간 내게 해왔을 말을 상기했다. 위와 창자는 ‘제발 규칙적으로 먹어라. 맵고 짠 음식 좀 줄여라. 술, 담배를 끊어라’라고 수천번 넘게 말했을 것이다. 다른 장기들이 그간 내게 퍼부었던 충고 또한 산더미 같으리라. 다시 스님의 죽비소리. “자신의 심장과 간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17년 전, 지리산에서 도보순례를 할 때 함께 걸었던 젊은 친구가 생각난다. 산야초 전문가였는지 걷다가 이것저것 뜯어 먹곤 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돌아온 답이 대단했다. “내 몸이 신전인데 아무 거나 먹으면 되나요?” 몸이 신전이라니. 자기 몸을 신전으로 여긴다면 음식은 물론 마음가짐도 남다를 것이었다. 낯빛이 맑고 언행이 늘 단정했던 그 친구 덕분에 “신전은 식물성이다”라는 시의 한 구절을 얻었지만, 도보순례를 마치고 원상 복귀하고 말았다. 여전히 내 마음이 신전이고, 몸은 신전 저 아랫마을이었다.

모니터를 통해 대장 내부를 바라보는 심경은 낯설고 불편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저 관(管)의 양 끝, 즉 입과 항문으로 섭취와 배설을 반복하며 목숨을 지탱해온 것이다. 모든 장기가 내가 태어난 이래 지금까지 쉬지 않고 자기 역할을 다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 자명한 사실 앞에서 나는 경건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몸이 신전이란 말은 메타포가 아니다. 발견이다. 몸은 실제로 신전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몸은 우주 자연을 호흡한다. 그러니 건강하다는 것은 외부 세계와 원활하게 소통한다는 것이다.

일찍이 프랑스의 의철학자 조르주 캉길렘이 정곡을 찔렀다. 그는 “건강을 되찾는 것은 원상태로의 복귀가 아니라 새로운 질서의 출현”이라고 말했다. 건강하기를 바라는 우리 몸이 전환의 장소다. 몸에게 말을 걸자. 몸이 하는 말에 귀 기울인다면 분명, 지금과 다른 삶과 사회를 꿈꿀 것이다.

<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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