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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국제도서전이 한창 진행되던 초여름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가득 찬 바쁜 현장에 초로의 숙녀 한 분이 찾아오셨다. 자원봉사자에게 내 이름을 대며 찾는 것을 들어 고개를 돌리니 중학교 때 담임선생님이었다. 한눈에 알아보았다. 연락 한 번 없는 무심한 제자를 보시겠다고, 도서전 일을 한다는 신문기사 한 줄만 믿고 찾아오셨다. 이산가족들이 떨어져 있던 70~80년 세월보다는 짧지만, 그 절반은 넘는 세월을 지나 만나 뵌 셈이다. 반가웠지만 송구한 마음에 몸 둘 바를 몰랐다. 갓 부임했던 새댁 선생님이 어느새 정년퇴직을 하고 손주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계셨다. 선생님과 함께 가출한 친구들을 찾아 산길을 헤맸던 일부터 정성스레 써 주셨던 손편지의 기억까지, 많은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내가 만드는 잡지를 챙겨 드리고 배웅하면서 선생님께 ‘물상’ 과목을 배웠던 것을 떠올렸다.

나는 ‘물상’이라는 이름이 좋았다. 물건·사물을 뜻하는 ‘물(物)’이라는 글자와 모양, 형상을 의미하는 ‘상(象)’이라는 글자를 조합해 만든 과목은 그 뜻대로 사물의 형태, 모양, 그리고 그것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내게는 그 내용이 너무나 흥미로웠다. 심심하면 한자를 끄적이는 버릇이 있었는데, 가장 많이 쓴 글자가 아마도 ‘물상’이었을 것이다. 네모 안에 꽉 차는 두 글자의 조형적인 아름다움도 한몫 했겠으나 그 뜻에 강하게 이끌렸다. 내가 사는 세상을 이해하는 기본적인 틀을 그 과목에서 배웠다. 그 이해가 미래에 틀린 것으로 판명될지 모르지만 나는 아직도 그때 배운 틀 안에서 새로운 것을 더하고, 빼면서 세상을 이해하고 있다.

나는 세상의 사물을 구성하는 원소들이 어떤 것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것이 어떤 힘으로 결합했다가 떨어지는지 배웠다. 그리고 그 원소들이 어디서부터 왔고 그 기원으로부터 시간이 흐르고 별들이 만들어진 것을 알았다. 별과 행성의 움직임과 우주를 탐구하는 방법을 배운 것도 이 과목을 통해서였다. 포세이돈이 화가 나 풍랑이 일고, 옥황상제의 웃음에 바람이 잦아드는 것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살아간 사람들도 있다. 지구를 중심으로 우주의 모든 천체가 돌고 있다고 믿으면서 평생을 보낸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세상에 대한 표준적인 이해와 어긋나는 생각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중학교에서 배운 표준적인 이해는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이해에 근거해서 과학은 여전히 빠른 속도로 새로운 사실들을 밝히고 새로운 기술들을 선보이고 있다. 우리의 삶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원자력, 미세먼지, 지구온난화 등 현상들도 결국은 내가 중학교 때 배웠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해법을 찾고 있다.

생각해보니, 그때쯤 배운 수학도 제법 요긴하게 써먹는다. 간단한 셈은 초등학교 몫이지만 그래도 복잡한 도형들을 그릴 줄 알고 거리도 가늠하는 것은 중학교 때까지 배운 수학이 그 기초를 다져주었기 때문이다. 복잡한 로봇과 우주선이 등장하거나 의학적인 내용을 다루는 만화, 영화, 그리고 소설들을 즐기는데 그때 배웠던 수학과 과학이 큰 도움을 주었다. 탐정 이야기의 추리도 이때 배운 지식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재미있게 따라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부터 꾸준히 익힌 기초가 없었다면 신문 한 줄을 읽거나 뉴스 한 토막 귀동냥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터. 엄하게 가르쳐 주셨던 먼 옛날의 선생님들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중·고등학교에서 익힌 수학과 과학은 세상을 사는 데, 그리고 즐기는 데 없어서는 안될 요소들이었다. 원소 이름 하나 더 알고, 성질을 이해한다고 삶이 달라지지 않는다고, 그 정도 계산이나 지식은 인간이 인공지능을 따라갈 수 없는데 무슨 필요가 있냐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이야기해주고 싶은 것이 있다. 세상을 이해하는 기본적인 틀과 그것을 자신의 삶과 연결시키는 과정이 없다면 개인의 삶은 지워질 것이고 그들은 행복할 수 없다. 고등학교에서 어려운 수학과 과학 내용을 어디까지 배워야 하는지는 다른 문제이다. 

하지만 고등학교에서 수학과 과학을 계속해서 배우고 훈련하지 않는다면 인공지능과 함께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아이들은 큰 문제와 맞닥뜨릴 것이다. 인공지능의 작동 방식과 인공지능이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그것을 아는 사람이나 인공물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다. 전공이나 직업과 무관하게 수학이나 과학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이것이, 나를 이리로 이끌어 주셨던 선생님께 내가 만든 과학 잡지를 계속 보내드리려고 마음먹은 까닭이다.

<주일우 | 이음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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