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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사면발니에 걸렸어요. 도와주세요.”

포털 사이트에 가보면 이런 식의 질문이 이따금씩 올라온다. 사면발니는 음모에 기생하는 ‘이’의 일종인데, 사는 곳의 특성상 성적 접촉으로 전파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사면발니에 감염된 남편들은 펄쩍 뛴다. 자신은 외부인과 성적 접촉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대신 그들은 ‘찜질방에서 걸렸다’거나 모텔, 사우나 탈의실 등에서 옮았다고 말한다. 물론 수건이나 팬티 등을 공유함으로써 사면발니에 감염되는 것도 가능하지만, 이런 일은 ‘지극히 드물다’고 문헌에 나와 있다. 게다가 찜질방에서는 새로 소독한 수건을 쓰지, 남이 음모를 닦던 수건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사면발니 환자들의 거의 전부가 찜질방을 통해 전파된다는 건 의학적으로 말이 안되는 얘기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이처럼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는 방법 중 가장 흔히 쓰이는 게 바로 거짓말이다. 사면발니에 걸리는 게 검찰이 관여할 일은 아니지만, 만일 검찰이 불러서 추궁한다면 끝까지 버틸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 거짓말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고, 어느 정도의 내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2016년 말을 뜨겁게 달궜던 국정농단 청문회의 최고 스타는 조윤선 전 문체부 장관이었다. 그는 시종일관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부인해 질문하는 이를 미치게 했는데, 국민의당 이용주 의원은 그로부터 블랙리스트가 실재한다는 사실을 실토받기 위해 같은 질문을 18번이나 던져야 했다. 결국 조윤선은 “그런 명단은 있었던 것으로 판단이 되고 있습니다”라고 답변함으로써 이용주 의원이 쓰러지는 사태를 막았다. 문체부 서기관에 따르면 작년 9월과 10월,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조윤선에게 보고했다는데, 논리와 집요함을 모두 갖춘 국회의원들 앞에서도 꿋꿋이 거짓말하는 그를 보면서 감동한 이는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결국 그는 위증 혐의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받고 만다. 사람들은 조윤선이 구속을 피했다고 아쉬워했지만, 그는 한술 더 떠서 항소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항소심에서 조윤선 측이 내세운 논리가 절묘하다. “9473명에 대한 리스트를 부인한 것이지 블랙리스트의 존재 자체를 부인한 허위증언은 아니다”라는 것도 그렇지만, “해당 증언을 할 당시 선서하지 않았으니 법리적으로 무죄”라는 주장은 국회 출석을 앞둔 이들이라면 외워둘 가치가 충분하다. 물론 조윤선에게도 약점은 있다.

무조건 부인하는 그 뚝심은 대단하지만, 거짓말은 뚝심만 가지고 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상대가 결정적인 증거를 들이밀었을 때 의외로 쉽게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대단한 점은 여기에 있다. 국정농단을 수습하기 위해 마련한 대국민담화에서 세 번 모두 거짓말을 한 것도 놀라 자빠질 일이지만, 자신을 위해 일하던 변호인을 모두 자르면서 발표한 ‘자신의 입장’은 그의 거짓말 내공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이해를 돕기 위해 그의 말과 실제 하려던 말을 적어본다.

“무엇보다 저를 믿고 국가를 위해 헌신하시던 공직자들이 피고인으로 전락해 재판받는 걸 지켜보는 것은 참기 힘든 고통이었습니다”(“제 보복이 두려워 제게 헌신하시던 공직자들이 재판받을 때 모든 책임을 제게 떠넘기는 걸 지켜보는 건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사사로운 인연을 위해서 대통령 권한을 남용한 사실이 없다는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는 믿음”(“대통령 권한을 오직 사사로운 인연에만 사용했다는 진실은 절대로 밝혀져서는 안 된다는 믿음”)

“저는 롯데나 SK뿐 아니라 재임 기간 그 누구로부터도 부정한 청탁을 받거나 들어준 사실이 없습니다”(“재임 기간 중 부정한 청탁을 받거나 들어준 곳이 롯데나 SK뿐이겠습니까? 왜 얘네들만 가지고 그러는지?”)

“재판 과정에서도 해당 의혹은 사실이 아님이 충분히 밝혀졌다고 생각합니다”(“저와 변호인의 노력으로 인해 해당 의혹들이 제대로 밝혀지지 못했습니다”)

“법원이 6개월 동안 재판을 했는데 다시 구속 수사가 필요하다는 결정을 저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6개월이 아니라 6년을 해도 저는 재판을 훼방 놓겠습니다”)

“법치의 이름을 빌린 정치보복은 저에게서 마침표가 찍어졌으면 합니다”(“정치보복은 제 특기였는데, 그걸 제가 당하니 기분이 참 더럽습니다”)

“이 사건의 역사적 멍에와 책임은 제가 지고 가겠습니다”(“다 제가 저지른 사건이지만, 책임은 티끌만큼도 질 수 없습니다”)

이런 명문이 왜 화제가 되지 않았는지 의아할 정도다. 박근혜의 뛰어난 점은 거짓말이 일상이 된 탓에 스스로를 속이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런 분한테는 거짓말탐지기도 무용지물이고, 아무리 증거를 들이밀어도 별 소용이 없다. 그에게 있어서 불리한 증거는 다 조작이고, 사실을 털어놓는 증인은 정부가 회유한 이에 불과하니까. 희대의 거짓말쟁이가 청와대에 있어서 모든 비극이 초래됐다면, 지금 그가 있는 구치소는 자신에게 딱 맞는 자리일 터다. 그가 오래도록 그 자리에 머물기를 빈다.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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