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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얼마 전, 출판사 분과 새 책을 쓰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출판사가 내게 부탁하는 자리였으니 자신이 내겠다고 우겼지만, 그냥 내가 계산하고 말았다. 그곳은 중국집이었고 코스요리를 먹었으니, 누군가가 신고한다면 부정청탁금지법(이하 김영란법)에 걸릴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다.

돈을 내기 싫다면 해결책은 간단하다. 아예 안 만나거나 저렴한 곳에서 만나면 되지만, 아무리 싸다 해도 얻어먹는 건 오해의 소지가 있는지라 주로 전자를 택하고 있다. 이해관계가 없는 친구들과 만난다 해도 김영란법을 생각하면 머리가 복잡해진다. 더치페이 대신 한 명이 “오늘은 내가 쏜다”고 하면, 그것 역시 문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전문가에게 확인해보니 두 경우 모두 교수로서의 직무관련성이 없어 김영란법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보니 모임 자체를 잘 안 갖게 되는데, 이 선택은 내게 놀라운 경험을 선사했다.

자기 시간이 많아진 것이다. 가족과 보내는 시간도 늘어났지만, 연구에 쏟는 시간도 더 많아졌다. 외부강사료 제한을 둔 것도 바람직하다. 강사료가 지나치게 많을 경우 외부강의에만 관심을 둘 수 있지만, 그걸 제한해 놓으니 억지로라도 교수 본연의 업무에 충실할 수 있다. 내가 올해 4편의 논문과 4편의 책을 쓴 것도 다 김영란법 덕분이다.

9월28일이면 이 법이 시행된 지 1년이 된다. 옛 버릇을 버리지 못한 111명이 법을 어겨 조사를 받았고, 그중 3명이 구속되기도 했지만, 이 법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국민의 85%가 이 법안을 지지하고 있으며, 서울시교육청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학부모의 95%와 교직원의 92%가 ‘교육현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줬다’고 답했단다.

외식업과 꽃집은 이전보다 매출이 크게 줄었지만, 인터넷에 올라온 누리꾼 의견은 이에 대한 우려를 깔끔하게 정리해준다. “부정부패에 편승해 돈을 벌던 이들을 왜 우리가 걱정해야 하는가?” 정치권 일부에서는 식사 3만원, 선물 5만원, 경조사 10만원의 3·5·10의 상한선을 올리려는 움직임을 보이지만, 여기에 대해서도 누리꾼들은 “한 글자도 고치면 안된다”며 맞서고 있다. 정부가 만든 법에 대해 이렇게 높은 지지를 보인 적이 과연 있었나 싶을 만큼 정의사회 구현에 대한 국민들의 의지는 굳건하다.

아쉬운 점은 이 법의 적용을 받는 이가 공직자, 언론인, 교육자에 국한된다는 점이다. 이들과 배우자를 모두 합쳐도 400만명에 불과하며, 이는 우리 국민의 10%가 채 안되는 수치다. 사람이란 다 비슷하기 마련이라, 나머지 90%의 국민들이라고 부정청탁을 저지르지 말란 법은 없다. 몇 년 전 유행했던 광고를 보자. 회사에서 과장으로 일하는 오달수는 승강기 안에서 직장 상사의 딸이 K팝 콘서트에 가야 하는데, 티켓이 없다는 말을 듣는다. 같은 승강기에 있던 동료가 복잡한 결제로 어려움을 겪는 동안 오달수는 광고에 나오는 간편결제 서비스로 순식간에 결제를 끝내고 티켓을 건넨다. 상사는 말한다. “딸한테 점수 좀 땄어, 오 과장. 이제 오 차장인가?” 업무와 무관한 상사의 편의를 봐줌으로써 승진을 하는 건 김영란법이 청산하고자 하는 적폐다. 이 광고에 대해 규탄하는 목소리가 드물었던 건 회사마다 이런 유의 부정청탁이 수도 없이 많아서였으리라.

김영란법이 시행된 이후 첫 명절인 설에 즈음해선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신세계백화점이 내놓은 최고급 한우세트인 ‘명품 목장한우 특호’(120만원)는 이달 12일 판매를 시작한 지 4일 만에 준비한 120개가 매진됐다. ‘프리미엄 참굴비’도 10마리에 200만원이라는 비싼 가격에도 4일 만에 30개가 모두 팔렸다.” 공무원들이 혹시 문제가 될까 싶어 작은 선물도 마다하는 동안, 김영란법의 사각지대에선 이런 고가의 선물들이 오가고 있었다. 공무원이 받는 선물이 그런 것처럼 이 선물들 역시 공정사회를 어지럽히는 주범이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왜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것일까?

꼭 고가의 선물이 오가야만 부정청탁인 것은 아니다. 예컨대 철도청 직원이 추석날 내려갈 열차표를 지인에게 구해줬다면, 그로 인해 아무런 대가를 받지 않는다 해도 부정청탁일 수 있다. 그 행위로 인해 정당하게 표를 살 수 있었던 이가 표를 사지 못하게 됐으니 말이다. 이 원칙은 학생들에게도 적용된다. 내가 맡은 학생들에게서는 그런 일이 없었지만, 모 교수에 의하면 1학기 기말고사가 끝난 뒤 성적을 발표했을 때, 많은 학생들이 자신에게 연락해 성적을 올려달라고 했단다. 채점이 잘못돼서가 아니라 장학금을 타야 돼서거나, 취업을 하려면 학점이 좋아야 하니까 유급을 면하기 위해서 등등이 그들이 대는 이유였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부정청탁 금지의 대상에서 자신들이 제외돼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비단 학생들뿐 아니라 이런저런 인연을 빌미로 부정한 청탁을 하는 이들은 도처에 있으리라. 김영란법을 전 국민을 대상으로 확대할 필요성은 여기에 있다. 김영란법 시행 1년 만에 공직자와 교육계, 그리고 언론계가 깨끗하게 바뀐 것처럼, 김영란법의 전면 확대는 우리나라를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나라로 바꿔줄 것이다. 부정부패에 편승해 이득을 취하던 이들아, 김영란법의 철퇴를 받거라.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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