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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에 잘나가는 사람(이하 잘난 사람)이 있으면 삶이 편할 것 같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상의하는 건 물론이고, 정 부탁할 게 없더라도 밥 한 끼는 얻어먹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별로 좋을 게 없단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잘난 사람은 너무 바빠서 주위 사람을 챙길 겨를이 없고, 자신에게 부탁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어서 일일이 다 들어주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뜨더니 변했다”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TV에 몇 번 나가면서 인지도가 상승하자 삶이 굉장히 바빠졌다. 할 수 없이 그간 나가던 모임들을 정리했다.

그런데 지인들로부터 온갖 청탁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방송국 구경시켜 달라” “컬투 사인 받아 달라” “연예인과 소개팅시켜 달라” 등등. 들어준 경우도 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거절한 적도 있는데, 거절당한 쪽에서는 즉각 이런 소문을 냈다. “서민 말이야, 뜨더니 변했어.” 방송에서 다 잘려 한가해진 지금, 이때 남은 앙금 때문에 만날 사람이 없다.

이게 갑자기 뜬 사람의 일반적인 행보다. 그런데 잘난 사람이 의리까지 있어서 주위 사람 챙기는 일을 무엇보다 우선시한다면 어떨까?

주위 사람들은 행복에 겨워 그를 칭송하고, 그 광경을 본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든 그 잘난 사람과 친해보려고 갖은 노력을 다한다. 보기만 해도 흐뭇해지는 시나리오, 설마 이런 분이 있냐고? 있다. 놀라지 마시라. 그분은 바로 현 대통령이시다.

이분이 자신의 의리를 만천하에 드러낸 것은 취임한 지 4개월이 지났을 무렵이다.

당시 정국은 국정원 때문에 시끄러웠다. 대선 당시 국정원이 직원들을 시켜 야당 후보를 비방하는 댓글을 달게 한 것이 사실로 드러났으니까. 게다가 그 사건을 물타기하려고 국정원이 남북 정상 간의 회의록을 공개해버렸다. 남재준 국정원장을 해임하라는 여론이 비등했지만, 대통령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남 원장은 2007년 대선 경선 때부터 자신을 도운 충신이었으니까.

그로부터 1년 뒤엔 국정원이 없는 간첩을 만들려고 증거를 조작했다는 게 드러났다. 이번에야말로 국정원장이 해임되겠거니 했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이번에도 남 원장과의 의리를 선택했다.

김기춘 비서실장과의 관계도 감동적이다. 2013년 8월부터 비서실장직을 수행하고 있는 김 실장은 현 정부 인사참사의 배후로 지목된 데다 최근 비선 논란과 관련돼 그 이름이 오르내리는 등 경질될 사유가 충분했다. 하지만 대통령은 김 실장 편이었다.


왜 이럴까? 대통령은 그 이유를 “드물게 보는 사심이 없는 분”이어서란다. 사심이 없다는 게 어떤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26억원가량의 예금을 비롯해 김 실장의 재산은 37억원에 달하니, 돈 얘기는 아닐 것이다. 혹시 내가 생각하는 그 사심인가 싶기도 하지만, 그 나이쯤 된 분 중 그런 사심을 갖는 분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하지만 김 실장이 대통령 당선을 도운 원로그룹인 ‘7인회’의 핵심 멤버였고, 대통령이 보기 드문 의리파라는 걸 고려하면 모든 의혹이 풀린다.

이 밖에 ‘문고리 3인방’이라고, 문건에 나온 비선 파동에 연루된 청와대 비서관들의 교체 요구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선을 그었는데, “의혹을 받았다는 이유로 내치거나 그만두게 하면 누가 내 옆에서 일하겠느냐”고 말해주는 분이 주위에 있다는 건 그 자체로 축복이다.

이러다보니 다음과 같은 미담이 만들어졌다. 오래전부터 박 대통령과 친하게 지냈던 모씨의 딸이 승마선수인데, 한 대회에서 라이벌 선수에게 패했다. 그러자 그 대회의 심판들이 경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고, 승마협회에 대한 대대적 감사가 시작됐다. 그 감사에서 모씨에 대해 부정적인 보고서를 쓴 문화체육관광부의 국장과 과장이 좌천됐다.

이 사건들의 배후에는 모씨에 대한 의리를 지키려는 대통령이 있다는 것. 딸의 패배에 속상해하는 지인을 위해 발벗고 나서는 대통령이라니, 가슴이 뭉클해진다.

물론 미담은 대부분 과장되기 마련이며, 모씨 역시 “2007년 비서실장을 그만두고 난 뒤 만난 적이 없다”고 한 것으로 보아 필경 터무니없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신화가 만들어지고 대중들 사이에서 유포되는 걸 보면 평소 대통령의 의리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김보성씨가 현 정부 들어 뜬 것도 의리가 그만큼 이슈화됐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새삼 아쉬워진다. 내가 대통령과 아무런 친분관계가 없는 것이.

내가 대통령의 측근이라면, 수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기생충이 멸종해서 힘드네요”라고 한마디하는 것만으로 기생충 감염률을 1960년대로 되돌릴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구충제 판매가 금지되고, 기생충 감염의 산실이던 인분비료가 다시 부활하지 않았을까?

기생충들아, 미안하다. 다 내 잘못이다.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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