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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배넛이 쓴 <일반적이지 않은 독자>는 뒤늦게 책읽기에 재미를 붙인 70세 영국 여왕이 점점 변하는 내용이다. 흔히 변한다고 하면 나빠지는 것을 생각하지만, 여왕의 변신은 그 반대다. 책을 읽으면서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주인공이 느끼는 감정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다보니 현실에서도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는 게 가능해졌고, 그들이 현재 상황을 어떻게 느끼는지 알 수 있게 됐다. 즉 여왕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좀 더 알게 됐다. 타인에 대한 배려는 책을 많이 읽으면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선물이었다.

초반 몇 달을 제외한다면, 사람들은 세월호 유족들을 끊임없이 비난하기 바빴다. 세월호 관련 기사가 나올 때마다 젊은층으로 짐작되는 누리꾼들은 이런 댓글을 달았다.

“세월호 사건은 놀러가다가 교통사고가 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왜 정부한테 뭐라고 하느냐?” “돈 십억씩 받고도 모자라 더 받아내려고 이러느냐?”

사고 초기 교통사고 운운했던 새누리당 분들이 엄청난 비난에 직면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런 변화는 그저 개탄스럽다. 세월호 사고로 동생을 잃은 언니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악성 댓글보다 교통사고라고 하는 게 더 속상해요.”

심지어 세월호 인양에 반대하는 이들도 한둘이 아니다. 세금이 아까운데 그 고철덩어리를 뭐하러 인양하느냐는 것. 이들은 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요즘 젊은이들이 책을 읽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 청년들은 시시때때로 책을 읽었고, 삼삼오오 모여 우리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결과 그들은 신문에서 하는 얘기를 믿는 대신 그 행간을 읽음으로써 진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청년들은 책을 안 읽으니 자기 생각을 만들지 못하고, 정치인과 언론의 조종에 쉽게 넘어간다. 책을 읽지 않는 부작용은 이것만이 아니다. 타인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보는, 역지사지의 정신을 배우지 못한다는 것. 예컨대 추리소설가 히가시노 게이고가 쓴 <방황하는 칼날>은 딸을 잃은 아버지가 복수를 하는 스토리인데, 읽다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죽을 때까지 지옥 같은 삶이 계속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불합리하게 빼앗긴 사람은 어디에서도 빛을 발견할 수 없다.”(106쪽)

세월호 참사의 유족들 마음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어이없이 침몰한 배, 단 한 명도 구조하지 않은 해경, 진상규명에는 담을 쌓은 정부, 얼마나 답답할까? 하지만 책과 담을 쌓은 누리꾼들은 세월호 유족들의 심경을 헤아리기는커녕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짜증을 내고, 유족들을 위해 쓰는 돈이 아깝기만 하다.


그래서일 것이다. 정부가 세월호 유족들을 마음 놓고 홀대하는 까닭이. 오로지 자신의 지지율에만 신경을 쓰는 그들이 세간의 여론을 모를 리 없다. 그래서 그들은 유족들의 양보로 만들어진 세월호 진상규명특위를 ‘세금도둑’이라고 비난하고, 특위의 활동을 방해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유족들에게 거액의 배·보상금을 제시하기도 했는데, 배·보상금이라는 것이 사고의 진상이 다 밝혀진 뒤 지급하는 돈이라는 점에서 이는 “진상이고 뭐고, 이제 그만 입을 다물라”는 협박이었다.

재난 관리의 컨트롤타워는 아닐지 몰라도 국정 최고책임자로서 세월호 사고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 1주기인 4월16일 당일, 남미 순방을 떠난다. 청와대 관계자에 따르면 원래 18일에 출국할 예정이었는데 콜롬비아 대통령이 제발 좀 와달라고 읍소하는 바람에 출국일을 이틀 앞당겼단다. 꼭 그를 만나야 할 사연이 뭔지 모르겠지만, 세월호 참사에 대해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면 하루쯤 늦는다고 큰일날 것도 없을 것 같다. 혹시 생일인가 싶어 자료를 찾아보니 콜롬비아 대통령의 생일은 8월10일이다. 그럼에도 꼭 4월16일 출국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유가 무엇이건 이건 대통령이 그만큼 세월호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세월호 유족들을 욕하는 누리꾼들이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은 이 땅에서 유사한 사건·사고가 다시는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는 것 말이다.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세월호 참사는 바로 우리 자신들의 일로 돌아올 수 있다. 인양에 드는 세금 몇 천억원이 아까울 수는 있겠지만, 그걸 아낀다고 우리네 삶이 얼마나 더 행복해지는지 생각해 보시라. 그리고 이제라도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책을 읽으시라. 남들의 생각을 자기 생각인 양 착각하는 대신, 스스로의 생각을 만들고 주체적으로 사고하는 연습을 하자. 계속 스마트폰만 본다면 시간은 잘 가겠지만, 나중에 당신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어디 한 군데 호소할 곳이 없을지도 모르니까.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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