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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열심히 보는 드라마 <압구정 백야>는 <인어아가씨> 등을 집필했던 스타 작가 임성한이 ‘방송국을 소재로 한 가족이야기를 그리자’는 것이 기획의도였단다. 방송국에서 일하는 주인공 백야가 자신을 버리고 재가한 어머니에게 복수를 맹세할 때만 해도 기획의도대로 가나 싶었지만, 임성한의 작품들이 다 그렇듯 뒤로 갈수록 내용이 이상해졌다.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백야의 친구인 ‘육선지’의 존재감이었다. 대부분의 드라마에서 여자주인공의 친구는 주인공이 남자한테 배신을 당했을 때 “어쩜 그럴 수 있니?”라며 같이 흥분해 주고, 가끔 되지도 않는 우스갯소리로 억지웃음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이 고작이었지만, 이 드라마는 그와는 차원을 달리한다. 즉 육선지는 회가 거듭될수록 극중 비중이 높아지는데, 지루할 만치 길게 편성된 결혼식 장면도 그랬지만, 신혼여행지에서 신랑과 닭살 돋는 장면이랄지, 육선지가 결혼 후 친구들을 만나러 갈 때 중전마마를 연상케 하는 한복을 입고 가 화제가 된다든지 하는 장면들을 보면 도대체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누군지 헷갈릴 정도다. 최근에는 그녀가 아들 네 쌍둥이를 출산해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그러다보니 시청자게시판은 “이게 압구정 백야가 아니라 압구정 선지다”라는 비아냥거림으로 도배됐다. 뭐로 보나 주인공급은 아니었던 육선지의 빛나는 활약에 대한 의문은 아내의 다음 말로 풀렸다.

“육선지 역을 맡은 배우, 임성한 작가의 조카잖아!”

실제로 육선지 역할을 맡은 배우 백옥담은 데뷔작부터 시작해서 딱 하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임성한 작가의 드라마에만 출연했다. 놀라운 연기로 극에 활력을 준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그 배우가 혈연을 제외하면 뭐가 있느냐’는 의문이 제기될 만하다. <압구정 백야>에 육선지가 캐스팅된 것도 임 작가의 영향력 때문이라는 게 많은 시청자들의 추측이다. 그래서 아쉽다. 임 작가가 조카의 앞날보다 드라마가 잘되는 것에 더 신경 썼다면 <압구정 백야>가 막장으로 치닫지 않았을 수도 있었으니까. 비단 임 작가만 욕할 일은 아니다. 인사권을 쥔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자신과 친한 사람을 요직에 앉히는 일이 제법 많으니 말이다. 그 정도가 심한 대표적인 분은 바로 대통령인데, 이분의 원칙은 다른 걸 다 떠나서 자신과 친하냐 아니냐인 듯하다.

얼마 전까지 국무위원 18명에는 대선 때 자신의 비서실장을 지냈던 최경환 경제부총리를 비롯해 친박 출신 국회의원이 3분의 1인 6명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분들이 정말 훌륭한 분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돈을 받았다는 의혹에 대해 거짓말로 일관하다 물러난 이완구 총리의 예에서 보듯 그다지 신뢰가 가진 않는다. 친박인사의 중용은 비단 국무위원에만 국한된 건 아니어서, 민병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에 따르면 2014년 3월부터 9월까지 공기업, 준정부기관 등에 임명된 친박인사는 무려 94명이었단다. 나도 서민이 아닌 박민이었다면 뭐라도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시청자에게 욕만 좀 먹으면 되는 드라마와 달리 국무위원과 공기업에 자격 없는 사람이 임명되는 건 큰 후유증을 남긴다는 점에서 우려스러운 일이다.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


1948년 탄생한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을 표방하면서 국민들은 얼떨결에 선거권을 갖게 됐다. 1971년 선포된 유신은 대통령을 뽑을 권리를 박탈했지만, 줄기찬 투쟁 끝에 국민들은 그로부터 16년 후 대통령 선거권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1995년에는 자기 지역을 위해 일할 사람도 스스로 뽑게 됐으니, 이쯤 되면 국민이 여러 요직의 인사권자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렇다면 국민들은 그 인사권을 잘 행사하고 있을까? 내가 보기엔 아닌 것 같다. 누가 진정으로 지역과 국가를 위해 일을 잘할 것인가를 기준으로 삼는 대신, 특정 후보가 자기 지역 출신이라서, 아니면 상대 후보가 종북이라는 공작에 놀아나서 표를 던지는 사례가 제법 많으니 말이다. 그 결과 한 도지사는 우리나라에 몇 없는 공공병원을 없애버렸고, 아이들 밥 주는 걸 가지고 이전투구를 하고 있으며, 그것도 모자라 한 기업인으로부터 1억원을 받았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일에 대해 그를 뽑은 사람들을 비난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압구정 백야>가 시청자에게 몰매를 맞으며 막장으로 치닫자 MBC는 “약속된 주제대로 진행되지 않아 당혹스럽다”면서 “다시는 임성한 작가와 작품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인사는 어찌됐건 욕을 먹고 있고, 대통령의 지지율을 떨어뜨리는 가장 큰 이유다. 하지만 그간 숱한 잘못된 선택을 했던 국민들에게는 책임을 묻는 이가 없다. 이렇게 물어보자. 국민의 뜻은 늘 위대하며, 국민은 모든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는가? 일말의 책임도 지지 않는 인사권이 과연 옳은 것인가? 마침 오늘은, 일부 지역에 국한되긴 했지만, 재·보선이 실시되는 날이다. 후보자의 고향과 종북논란에 구애받지 않는, 해당 지역민들의 올바른 선택을 기대해 본다.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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