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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대 대선을 앞둔 2007년 12월13일, 당시 한나라당 클린정치위원장 홍준표는 편지 한 통을 공개했다.
“나의 동지 경준에게…. 자네가 큰 집하고 어떤 약속을 했건 우리만 이용당하는 것이니 신중하게 판단하길 바라네.”
홍준표에 따르면 이 편지는 김경준과 같이 수감생활을 한 신경화가 김경준에게 보낸 것으로, 김경준이 우리나라에 온 이유가 노무현 대통령의 요청에 의한 것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BBK 대표였던 김경준은 주가조작으로 미국으로 도망간 상태였는데, 대선을 앞두고 그가 귀국한 것은 BBK를 자신이 설립한 것처럼 얘기하고 다녔던 이명박 후보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신경화의 편지가 공개되면서 상황이 달라졌고, 결국 이명박 후보는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로부터 4년 뒤, 신경화의 동생이 “그 편지는 이명박씨 가족과 측근의 부탁으로 내가 날조한 것”이라고 폭로하고, 옥중에 있던 김경준은 가짜편지 작성자들을 고소하기에 이른다. 2015년 7월, 재판부는 “가짜편지로 인해 김경준이 정신적 고통을 입었다”면서 가담자들에게 15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쯤 되면 가짜편지를 쓰게 한 배후가 누구인지 궁금해지는데, 검찰의 결론은 “배후는 없다”였다. 홍준표를 비롯해 편지의 유통에 관여된 사람들은 편지가 조작된 사실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배후가 될 수 없다는 게 검찰의 말. 그 말대로라면 홍준표는 누가 썼는지도 모르는 편지를 대선의 판세를 뒤흔드는 결정적 증거인 양 기자들 앞에서 흔들었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가담자들은 왜 그런 위험한 일을 벌였을까. 대선에서 공을 세워 좋은 자리를 얻기 위한 목적이었다는 게 검찰의 친절한 설명이다.
김경준씨가 옥중에서 경향신문 기자에게 보낸 편지_경향DB
대부분의 사람들은 뭔가 보장을 받고 난 뒤에야 위험한 일에 뛰어든다. “이번 일만 잘되면 자넨 신차장이야” 정도의 약속은 있어야 불법적인 일을 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가짜편지 작성의 가담자들은 위로부터 아무런 언질도 없이 위험천만한 일을 했다니,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쉽게 수긍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게 바로 검찰이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했으며, 그 어렵다는 사법시험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한 엘리트다. 별다른 고비 없이 승승장구하다 보면 세상이 따뜻한 곳이라고 생각하기 마련. 검찰은 다른 사람들의 말을 너무 잘 믿는 집단이 됐다. 다른 면에서는 뛰어날지언정 배후를 밝히는 일은 검찰에게 거의 불가능한 미션이 된 것도 그 때문이다. “나는 몰랐다”고만 하면 더 이상 그를 의심하지 않고 수사를 종결해버리고, “배후는 없다”는 식의, 자신들 이외에는 아무도 믿지 않을 수사결과를 발표하는 일이 검찰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그 결과 우리나라의 굵직한 사건들은 대부분 배후가 없다. 2012년 선거 직전 대인배 김무성 의원이 비공개가 원칙인 남북 정상 간의 회의록을 피 토하듯 읽었지만, 회의록 유출 여부를 수사한 검찰의 결론은 ‘무혐의’였다. 검찰에 출석한 김 의원이 “대화록을 본 일이 없다”고 했으니, 순진무구한 검찰로서는 그 말을 믿을 수밖에. 국정원 댓글사건을 소신껏 수사하던 채동욱 검찰총장은 느닷없이 혼외아들 의혹이 불거지면서 총장 자리에서 쫓겨났다. 이 과정에서 청와대 민정수석실과 교육문화수석실, 고용복지수석실 등에서 채 총장의 아들과 그의 어머니 임씨에 대한 정보를 열람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도대체 누가 이런 일을 지시했는지 의혹이 집중됐지만, 검찰의 조사결과 이것들은 모두 개인적 일탈일 뿐 배후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검찰은 청와대 관계자들이 업무에 바쁠 것을 고려해 서면조사를 하는 세심함을 보였다니, 이 세상이 살 만한 곳인 이유는 이런 분들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최근 국가정보원이 이탈리아의 해킹업체로부터 해킹 프로그램을 주문한 것이 밝혀져 파장이 일고 있다. 국정원은 북한 공작원을 해킹하기 위해 그랬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해킹하려던 것은 카카오톡이었다. 물론 북한 공작원도 카카오톡을 쓸 수 있지만, 그 경우 법원의 압수수색 영장을 받으면 카카오톡 대화 내용을 통째로 들여다볼 수 있으니 굳이 해킹 프로그램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게다가 국정원이 대선 직전 등 매우 민감한 시기에 프로그램을 구입했고, 국정원의 핵심 파트인 대북심리전단 팀이 주로 했던 일도 야당 후보를 욕하는 것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국정원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믿기는 힘들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모두가 아니라고 해도 검찰만은 국정원의 주장을 믿을 것임을. 만일 이 사건을 검찰이 수사하게 된다면 이번 사건 역시 국정원 말단직원 몇 명의 개인적 일탈로 마무리될 확률이 높다.
남의 말을 잘 믿지 않고 매사를 음모론적 시각으로만 바라보다 보면 사회가 혼탁해진다. 그러니 순진무구하기 짝이 없는 우리 검찰은 사회를 맑게 만드는 소중한 존재일 수 있다. 하지만 어쩌다 한 번씩이라도 검찰이 속시원하게 배후를 밝혀줬으면 좋겠다. 매번 반복되는 개인적 일탈이란 결론이, 이젠 좀 지겹다.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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