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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일이 있어 여의도에 갔다가 나이 드신 분들(이하 어르신)이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하는 모습을 봤다. 종북세력을 규탄하는 내용이었는데, 그때 든 생각은 ‘날도 더운데 고생이 많으시구나’였다. 갑자기 3년 전 대선 투표 때의 일이 떠올랐다. 투표를 마치고 근처 공원에 놀러 갈 생각에 아침 일찍 투표장에 갔는데, 길게 줄이 늘어서 있었다. 내가 사는 천안이 유난히 어르신들이 많은 탓인지, 아니면 나이가 들수록 부지런해서 그런지, 그 대부분은 어르신들이었다. 흰옷을 입은 채 차례를 기다리는 그분들의 얼굴은 무료해 보였다.
선거 때마다 어르신들은 연령대별 투표율에서 늘 1, 2위를 다툰다. 2012년 대선 때 60대 이상의 투표율은 80.9%로 전체 투표율을 가뿐히 넘겼고, 2014년 지방선거에서도 70대 이상의 투표율은 67.3%로, 한창 팔팔한 20대의 48.4%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어르신들은 왜 이렇게 투표를 열심히 하는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분들이 국가가 부여한 의무에 헌신적이라는 게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투표를 하는 것은 권리이기도 하지만 의무이기도 한데, 처벌이 뒤따라야 마지못해 의무를 다하는 젊은층과 달리 어르신들은 ‘의무’라고 하면 웬만해서는 지키려 하신다. 우리나라가 빠른 시간 안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것도 다 어르신들이 의무를 지키며 헌신한 결과였다.
그분들께 감사한 마음이 많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짠하다. 그렇게 나라에 공헌하신 분들인데, 70세를 넘긴 뒤에도 계속적으로 선거를 통해 국가에 기여하라고 강요하는 게 과연 옳은 것인지 의문이 들어서다. 나이가 들면 힘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무릎연골이 다 닳아서 걸을 때마다 아프고, 계단을 오르내릴 때는 특히 통증이 심하다. 계단이 있는 투표소가 많다는 것을 감안하면 투표 몇 번 했다가 골병이 들 수도 있다. 또한 나이가 들면 눈이 침침해진다. 투표용지의 글씨가 안 보일 수 있고, 손이 떨려 투표용지의 테두리 안에 붓두껍을 찍는 데 실패하기도 한다(테두리에 닿으면 실격이다). 간혹 판단력이 흐려지는 분도 계셔서, 지지하는 당의 기호가 몇 번인지 헷갈리시는 분도 계시다. 얼마 전 친구 문병을 갔다가 만난 83세 할아버지는 대통령 담화를 TV로 보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박근혜 대통령이 말씀은 정말 잘하셔.”
현 대통령의 유일한 약점이 언변이 약하다는 것인데, 나이가 들다 보니 판단기준이 뒤죽박죽된 것 같아 안타까웠다. 정년이라는 제도를 만들어 놓은 것도 이제 그만 일하고 쉬시라는 취지라는 점에서, 생기는 것 하나 없는 선거의 의무를 계속 감당하게 놔두는 게 옳은지 중지를 모을 필요가 있다.
19세 미만인 학생들을 생각해 보자. 건국 이래 최고의 영어 실력을 갖춘 그 아이들이 성인에 비해 판단력이 떨어진다고 할 수 없고, 체력도 뛰어나 투표장이 5층에 있어도 하등 상관이 없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선거권을 부여하지 않는 것은 정치바람에 휩쓸리지 말고 공부에 전념하라는 취지다. 각 고등학교에 후보자들이 찾아가 자신을 찍어달라고 전단지를 돌리고, 학생들이 야당과 여당으로 편을 나눠 패싸움이라도 하는 광경을 상상해 보라. 절로 고개를 젓게 된다.
그런데 왜 휴식이 필요한 어르신들을 정치싸움의 현장에 그대로 방치하는 걸까? 어르신들로 하여금 젊은이에게도 버거운 가스통을 들고 거리로 나가도록 떠미는 것은 효를 최고의 가치로 숭상했던 우리나라의 전통과도 맞지 않는다.
이런 우려가 나올 수는 있다. 어르신들이 투표권을 갖지 못하면 어르신들의 권리가 침해될 수 있다고. 하지만 그런 걱정은 쓸데없는 것이다. 선거 때마다 그분들이 선거권을 어느 쪽으로 행사했는지를 생각해 보라. 어르신들은 노인복지를 우선시하는 후보보다는 22조원을 들여 강바닥을 파거나, 법인세를 깎아주는 후보를 훨씬 더 선호했다. 자기 계층의 이익보다 국가발전을 우선시하는 분들이라니, 가슴이 뭉클해지지 않는가? 우리 어르신들은 그렇게 사심이 없는 분들이고, 그랬기 때문에 우리 후손들이 이만큼이나마 살게 된 것이다.
한 가닥 불안은 있을 수 있겠다. 어르신들의 ‘올바른’ 선택이 종북세력으로부터 이 나라를 구해준 원동력인데, 70대 이상이 선거에서 빠진다면 이 나라가 흔들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불안. 단언컨대 그 걱정은 안 해도 될 듯하다. ‘일베’의 뛰어난 활약에서 보듯 우리 사회가 20대들을 워낙 잘 키운 덕분에 종북세력이 과거만큼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중이니 말이다. 설사 종북세력이 집권한다 한들, 메르스에 속수무책이고 지뢰 도발에도 불구하고 북한에 대화를 구걸하는 현 정부보다 못할 것 같지는 않다. 게다가 북한이 망하기라도 하면 종북세력은 구심점을 잃고 쓰러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어르신들, 나라 걱정은 접고 투표날 마음 편히 쉬십시오. 물 좋은 온천도 많으니까요.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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