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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전 국민 기생충 감염률이 80%를 넘나들었다. 거리에서 약을 팔던 약장수들이 구경하던 아이 한 명을 무작위로 불러내 회충약을 먹이면, 그 아이의 항문에서 회충이 떼거지로 배출되곤 했다. 같은 반 아이들 중 상당수가 기생충에 걸려 약을 먹어야 했지만, 난 초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단 한 번도 양성으로 나온 적이 없었다. 그때는 다행이라고만 생각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내겐 장차 기생충학자가 될 자질이 있었던 모양이다. 고양이 앞에 선 쥐가 도망칠 생각을 못한 채 몸을 떨고 있는 것처럼, 전 국민의 80% 이상을 삼켰던 기생충도 감히 내게는 들어올 생각을 못했으니까.

나뿐 아니라 다른 기생충학자들도 기생충에 걸리는 경우가 일반인에 비해 현저히 적은 듯하다. 어쩌다 감염사례가 나오긴 하지만, 그건 연구 중에 우연히, 혹은 일부러 기생충에 감염되는 게 대부분이었다. 톡소포자충 연구의 대가인 남모 선생님은 톡소포자충이 담긴 주사기에 손을 찔려 감염됐고, 장흡충 연구의 대가인 채모 선생님은 증상을 알아보기 위해 다른 연구원과 함께 기생충을 일부러 삼켰다. 나 역시 기생충에 걸려보려고 별의별 수를 다 썼지만, 아직까지 감염된 적은 없다. 만우절이던 4월1일, 무슨 거짓말을 할까 머리를 짜내다 ‘기생충에 걸렸다고 하면 어떨까?’를 떠올린 건 그런 이유였다. 기생충학자가 기생충에 걸렸다니 이 얼마나 웃긴가? 기생충으로 인해 입원했다는 글을 올렸더니 과연 호응이 엄청났다. 문병을 오겠다는 분들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대부분은 거짓말이라는 걸 알고 재미있어했다.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만일 진짜로 내가 기생충에 걸렸다면, 스타일 구겼을 거라고.

이런 식으로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경우는 뭐가 있을까? 몇 가지 경우가 떠오른다.

1) 가수 아이유가 노래방 대결에서 음치인 나보다 점수가 덜 나온다. 가수라고 해서 기계가 100점을 주지 않지만, 내게 점수를 더 주는 기계라면 노래방에 있어선 안된다.

2) 비행기도 돌리는 조현아씨가 택시기사에게 “차 좀 돌리자”고 했다가 거절당하는 것. 택시기사가 조씨를 알아본다면 충분히 가능한 스토리다.

3) 스컹크가 남이 뀐 방귀에 질식한다. 방귀 냄새가 독하다고 해서 남의 방귀 냄새를 잘 참는다는 보장은 없으니, 이것 역시 가능하다.

4) 이명박 전 대통령이 ‘누가 더 돈을 낭비하는가’를 겨루는 시합에 나가서 예선 탈락한다. 아무리 가정이지만, 이런 일이 있을 성싶지는 않다.


5) 박근혜 대통령이 ‘모래 속의 진주’라 극찬했던 윤진숙 해수부 장관이 ‘실없이 웃기’ 시합에서 1회전 탈락한다. 이것 역시 가능할 것 같진 않다.

6) 이완구 전 총리가 목숨을 담보로 한 치킨게임에서 닭한테 패한다. 물론 일말의 가능성도 없다.

7) 국정원이 악플달기 시합에서 일개 누리꾼에게 진다. 댓글에 있어서는 최고수인 국정원이 그럴 리는 없다.

8) 박 대통령이 묵언수행에서 스님한테 패한다. 우리나라 스님의 총수가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의 고수는 찾기 힘들 것 같다.

홍준표 경남도지사는 검사로 재직 중이던 1993년 ‘슬롯머신 사건’을 수사하면서 업계 대부인 정모씨 형제로부터 돈을 받은 정·관계 유력자들을 구속시켰다. 그중에는 6공 황태자로 불리던 박철언 전 장관도 있었다. 검찰 측에 물증이 없다는 것을 안 박 전 장관은 자신이 돈을 받지 않았다며 배달사고를 주장했지만, 홍 지사는 단호했다. 뇌물 사건은 대부분 물증이 없다고 박 전 장관의 변명을 일축했다. 목격자였던 홍모 여인의 증언은 결정적이었다. 결국 박 전 장관은 유죄판결을 받고 수감됐다. 이 사건은 스타 방송작가인 송지나씨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켰는데,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드라마 <모래시계>는 바로 이 슬롯머신 사건을 각색한 것이었다.

그 홍 지사가 지금 매우 곤궁한 처지에 놓였다. 한나라당 대표 경선 때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에게서 1억원을 받았다는 혐의로 검찰에 출두해야 했으니까. 슬롯머신 사건 때 박 전 장관이 그랬던 것처럼, 홍 지사는 배달사고를 주장한다. 성 전 회장의 자살로 검찰 측에 물증이 없다는 걸 믿는 탓이지만, 검찰은 단호했다. 1억원을 직접 전달했다고 알려진 경남기업 윤 전 부사장의 증언도 확보한 터였다. 사태가 점점 불리해지자 홍 지사는 급기야 “경선 기탁금 1억2000만원이 집사람의 비자금”이며, 그 돈은 국회대책비를 가로챈 것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뇌물보다는 횡령이 낫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모래시계>의 스타 검사가 22년 만에 피의자가 돼 검찰에 출두한 건 흡사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진 격이다. 이 사건이 또 다른 방송작가에게 영감을 줘서 ‘모래시계 속편’이 만들어지길 기대해본다.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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