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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지면을 넘기다 처음 보는 단어를 발견하곤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공간복지’.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한 정몽준 의원의 입에서 나온 이 한마디는 복지 담론의 궁극을 향하고 있을뿐더러, 오늘날 서울이 안고 있는 문제의 상당 부분을 해결할 수 있는 핵심 키워드로 읽혔다. 하지만 제목뿐이었다. 혹시 내가 잘못 이해했나 싶어 해당 기사를 거듭 읽었지만, ‘공간복지’라는 단어에서 느꼈던 기대감 이상의 깊은 실망감만 얻었을 뿐이다.


한 사회의 계층관계와 권력관계를 여실히 드러내는 그림으로는 필지(筆地)가 표시된 지도만 한 것이 없다. 도로에 면한 거대 필지의 소유자와 작은 골목 사이사이에 숨은 작은 필지의 소유자 사이에는 명백한 권력적 위계가 있다. 도시 안에 땅 한 평이라도 가졌다면 그래도 힘이 있는 축에 속한다. 도시 주민의 태반은, 도시 공간에 자신의 자취를 남길 권리조차 없는 사람들이다.

자본주의 도시는 본질상 주식회사와 비슷하다. 소수의 대주주가 회사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처럼, 자본주의 도시는 거대 필지를 소유한 대지주들이 도시의 변화 과정을 좌우한다. 대지주들은 거대 필지에 초고층 건물을 지어 자신의 권위를 드러낼 수 있으나, 같은 도시 주민이라도 땅 한 평 갖지 못한 사람들은 비록 자기 삶의 공간이라 하더라도 그 자리에 아무런 표시도 할 수 없다.

한강 아라뱃길 방문한 정몽준의원 (출처: 경향DB)

자본주의 이전부터 수백년간 도시로 존속해온 서울과 같은 역사도시들에서 역사란, 각 필지의 크기와 위치로 표현되는 계층관계와 권력관계의 변화 과정을 의미하기도 한다. 역사도시에서 개발이란 빈 땅에 건물을 짓는 일이 아니라 이미 다른 건물이 있던 땅에 새 건물을 짓는 행위이다. 지난 반세기 넘게 우리가 겪어온 바와 같이, 서울의 도시 재개발 과정은 정확히 사회의 양극화 과정과 궤를 같이했다. 지도에서 작은 필지들을 지우고 그들을 묶어 하나의 큰 필지로 만들어서는 큰 빌딩을 지어 올리는 것이 도시 재개발의 일반적 방식이었다.

현 대 서울 도심부 대로변은 모두 대기업과 은행이 소유한 거대 필지들로 가득 차 있다. 누구 땅인지도 알 수 없는 소형 필지들은 거의 사라졌거나 곧 사라질 운명에 처한 채 잔명(殘命)만 유지하는 정도다. 변두리 주택가라 해서 예외는 아니다. 수백개의 작은 필지들의 경계를 허물고 하나로 통합한 뒤에 그를 다시 그 필지들과는 본래 아무런 연고도 없던 수백, 수천 가구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하나의 거대 필지로 묶어서는 대단위 아파트를 짓는 것이 재개발이고 뉴타운사업이었다. 물론 이런 필지 통합, 대자본의 공간 지배가 평화롭고 순조로운 과정일 수는 없었다. 6·25전쟁 이후 한국 사회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는 바로 도시 재개발 현장들이었다. 1960~1970년대 판자촌 철거 현장에서, 1980년대 사당동 등지의 합동재개발 현장에서, 최근의 용산참사 현장에서까지 숱한 전투가 벌어졌고 많은 사람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입고 자기 삶의 터전을 떠나 다른 곳으로 퇴각하곤 했다.

‘공간복지’라는 말을 쓰려면, 먼저 이 현실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았을까? 공동체 구성원 누구에게나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최소한의 기본권을 보장해주는 것이 ‘복지’라면, ‘공간복지’란 이 도시에 사는 시민들 누구에게나, 땅을 가진 사람이건 그렇지 않은 사람이건, 자기 삶의 터전에 대한 최


소한의 권리를 인정해주는 것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토지를 갖지 못한 사람들의 ‘공간 이용권’에 대해서도 배려하는 것, 그들을 ‘강제 철거’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 이것이 진정한 ‘공간복지’여야 하지 않을까? 말로는 ‘공간복지’를 내세우면서도 공간에 대한 약자의 권리를 도외시하고 추진되었던 용산 재개발 사업을 재추진하겠다는 것은, 4대강 사업에 ‘녹색성장’이라는 터무니없는 이름을 붙였던 과거의 행태와 너무 똑같지 않은가?


전우용 |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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