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책꽂이에서 20여년 전 날짜가 적힌 책 두 권을 꺼낸다. 먼저, 극작가 마샤 노먼이 쓴 희곡 <잘 자요, 엄마>. 극 초반에 엄마에게 자살할 거라고 말한 딸은 극 마지막에 문을 걸어 잠근 방 안에서 권총으로 목숨을 끊는다.
극이 진행되는 동안 엄마는 딸을 달래고 설득하고 화를 내고 협박하며 어떻게든 딸의 마음을 되돌려 보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함께 살면서 늘 그랬던 것처럼 딸의 처지에서가 아니라 엄마 위치에서 생각한 말과 행동은 딸의 가슴에 가닿지 않았다. 극에 등장하지 않는 다른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오빠는 해마다 슬리퍼를 선물했는데 그것은 동생에게 필요하지도, 크기가 맞지도 않았다. 그이들은 의식하지 못했다. 섬세하지 못했다. 상대에게 무엇이 어떻게 필요한지 귀 기울이거나 마음 쓰지 않았다. 딸을 위해서였다지만 자신을 위한 말과 행동은 진실마저 감추었다. 딸을 자신들에게 불편하고 불안한 존재로 만들었다.
두 번째 책에는 극작가 존 프레스리가 쓴 <에바 스미스의 죽음>이 들어있다. 의문의 수사관이 어느 집을 방문해 한 여성이 약을 먹고 자살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그 집의 아버지는 공장을 운영하는데 몇 해 전, 임금인상을 요구했다는 이유로 열심히 일한 여성 노동자를 해고했다. 딸은 옷을 사러 갔다가 기분이 상했다는 이유로 아무 잘못이 없는 백화점 판매직 여성 노동자를 모함해 해고당하게 했다. 자선부인회 간부였던 부인은 혼자 아이를 낳아야 할 처지에 놓인 여자가 찾아왔을 때 매몰차게 내쫓았다. “가장 절박할 때, 가장 인간적인 도움이 필요할 때” 외면했다. 아들과 곧 사위가 될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에바 스미스를 직접 죽이지 않았지만, 모두가 연루된 죽음이었다. 수사관이 떠난 뒤, 수사관이 실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등장인물들은 자신들이 속은 건 아닌지 의심하면서 누구나 다 그러고 살지 않느냐고 없었던 일로 치부하려 든다.
오랜만에 사람들과 앞의 책을 소리 내어 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픈 죽음을 들었다. 희곡 속 주인공은 마지막 장에서는 죽지만 다시 앞장을 펼치면 살아있다. 방향을 조금 바꿔 원작을 각색해 공연한다면 죽지 않는 것으로 결말을 낼 수도 있다. 드라마에서는 가능하지만, 현실에서 죽음은 만약이라는 가정도, 되돌림도 불가능하다.
60대 여성노동자가 두 딸과 함께 죽음 말고도 다른 살 방법을 찾을 수 있는 작은 숨구멍이 세상 어딘가에 있었다면, 여태껏 고단했을 삶이 앞으로 더 고단해지더라도 부여잡을 무언가가 있었다면…. 그이들이 죽음으로 말해버린 것을 제대로 읽어낼 수 없는 나는 잠시 안타까워하는 것으로 책임을 회피한다. 두 희곡 속 등장인물들과 나는 과연 얼마나 다를까.
여성노동자 노동처우 개선 촉구 (출처: 경향DB)
지난 토요일, 서울 청계광장과 보신각 앞에서 3·8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한 행사가 열렸다. 그 거리에 서니 세상을 떠난 저이들이 떠올랐다. 광장에 모여 다른 여성들과 씨줄과 날줄로 엮여보지 못하고 가버린 여성들.
이제 책이 아니라 여성노동자대회에서 이야기를 듣는다. 먼저 간 세 여성과 각기 비슷할 나이대의 여성들이 자신들이 처한 현실을 전했다.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단시간 노동 계약을 강요하는 대형 유통할인매장, 눈을 쓸다 다치면 용역업체 소장한테서 “그만둬야지, 어디서 산재처리를 얘기하느냐”는 말을 들어야 하는 대학 청소노동자, 6개월마다 평가를 통해 재계약을 해 1년9개월을 일했는데 무기 계약직으로 전환되는 2년을 3개월 앞두고 비정규직보호법을 교묘하게 이용해 비정규직 간호사를 해고하고 다시 그 자리에 비정규직을 들이는 병원, ‘민간위탁 직접고용’을 요구하니 일군의 상담사들을 해고하려 드는 콜센터, 여성 조합원들이 일하는 곳과 탈의실로도 쓰는 휴게실에 감시카메라를 설치하는 제조업 현장, 이에 특별근로감독을 나와 달라는 노동자들의 요청에 바쁘다는 핑계를 대더라는 노동청…. 여성, 노동자, 가난한 이들을 외면하는 이 무딘 사회에서 더는 누구도 삶을 빼앗기지 않기를….
박수정 | 르포작가
'일반 칼럼 > 세상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상읽기]벌거벗은 ‘임금’님 (0) | 2014.03.24 |
---|---|
[세상읽기]공간복지와 용산 재개발 (0) | 2014.03.17 |
[세상읽기]야속한 정치, 약속의 정치 (0) | 2014.03.03 |
[세상읽기]‘수출용’ 민주주의 (0) | 2014.02.24 |
[세상읽기]‘악마성’을 깨우는 정치 공작 (0) | 2014.0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