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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의 사설 해병대 캠프에서 훈련받던 고등학생 5명이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세상에 아깝지 않은 목숨이 어디에 있겠는가마는, 채 피어보지도 못한 어린 생명이 스러졌다는 소식을 접할 때면, 그 부모들의 극렬한 아픔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해 더 견디기 어렵다. 아이들을 죽이고 부모들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한을 남긴 것은 구명조끼 없이 바다에 뛰어들라는 부당한 명령만이 아니었다. 더 직접적인 것은, 그에 후속된 무모한 집단적 순응이었다. 시쳇말로 ‘까라면 까는’ 것이 군인정신의 정수이자 남성다움의 본령이라는 믿음이었다.
태안 캠프 희생자 가족 (연합)
국민들에게 ‘자발적으로 순응하는 신체’를 갖추라고 요구하는 것은 근대 국민국가의 주요 특징이고, 군대가 그런 신체를 만들어내는 가장 효율적인 기구였던 것도 보편적 현상이지만, 식민지 근대는 개인의 자발성을 극도로 왜소화하고 일방적 순응만을 요구했다. 학교 교육에서 남녀 불문하고 ‘온순 착실한 성격과 방정한 품행’만을 요구하던 일제가 ‘박력’을 강조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조선인을 침략전쟁에 동원할 준비에 착수하면서부터였다. ‘밀어붙이는 힘’이라는 뜻의 이 단어는 명령에 따라 앞뒤 가리지 않고 돌격해야 하는 말단 보병에게나 어울렸지만, 곧바로 남성성을 표상하는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더불어 오랫동안 남성성을 대표하는 정신이자 태도였던 기개와 지조는 성가신 개념이 됐다. 부정한 권위에 맞서고 부당한 명령에 불복하는 것은 비국민적 악덕으로 재배치됐다. 식민지 원주민들을 기개 없는 박력, 지조 없는 돌격정신을 지닌 제국 군대의 사병으로 만들기 위한 유효한 수단이 무자비한 구타였다.
해방 후 식민지 군사 문화의 문제점을 스스로 성찰할 여유도 없이 전쟁이 터졌다. 부득이하게 사회 전반이 전쟁의 논리에 지배됐다. 혹자는 인간이 발명한 가장 무모한 짓이 전쟁이라고 한다. 전쟁은 살인, 방화, 약탈을 정당화하고, 묻거나 따지거나 망설이는 행위를 죄악시한다.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을 유보한 채 아무리 무모한 명령이라도 충실히 이행하는 인간, 기계의 부품처럼 움직이며 문제가 생겼을 경우 즉각 교체할 수 있는 인간이 전시 군대가 요구하는 효율적인 인간이었다.
일본 육군성에 의해 징병된 한국 학생들
총성이 멎은 뒤에도 분단 상태는 지속됐고, 군사적 관점에서 국민의 자질을 규정하는 태도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 같은 상황에서 “군대 갔다 와야 사람 된다”는 말이 설득력 있는 담론으로 통용됐다. 물론 보통의 남성들은 ‘사병’으로 군대에 갔다. 사병에게 명령은 자신이 개입할 수 없는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사람 된다’는 것은 하달된 명령만을 성실히 이행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했다.
전쟁의 논리가 지배하는 상황에서 대량 생산된 ‘사병형 국민’들이 군사독재 체제와 초기 개발 경제를 떠받쳤다. 기계적인 단순노동을 기축으로 한 초기 경제 개발 과정에서는 이런 국민이 유효하고 유능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개발독재’라는 작명에는 정합성이 있다.
노량진 배수지 공사현장 실종자 가족 (경향DB)
산업구조가 고도화하고 민주주의가 진전함에 따라 군사 문화의 지배력도 약해졌다. 복종과 순응만을 가르치던 학교 교육이 변했고, 폭력적인 병영 문화도 개선됐다. 하지만 국민 다수를 사병의 위치에 묶어두려는 요구와 그를 주체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는 요지부동인 듯하다. 태안에서 고등학생 5명이 참사를 당하기 며칠 전, 서울 노량진에서 노동자 6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들도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지하에서 일하라는 부당한 명령에 순응한 사람들이었다. 태안 사고는 노량진 사고의 과거상이고, 노량진 사고는 태안 사고의 미래상이다.
너도나도 나라의 새로운 미래를 약속하지만, 새로운 사람이라야 새로운 미래를 열 수 있다. 지금 이 나라에 진정 필요한 국민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하는 사병형 국민이 아니라 묻고 따지고 항의하며 ‘명령’ 자체에 개입할 수 있는 민주적 국민이어야 하지 않을까? 부정한 권위에 맞서는 ‘기개’와 부당한 명령에 불복하는 ‘지조’를 지닌 국민.
전우용 |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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