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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세상읽기

[세상읽기]귀가

opinionX 2013. 7. 22. 12:43

새벽 3시.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가장 가까워진다는 시간. 어떤 남성이 계단을 걸어 오른다. 출퇴근을 반복하며 걷고 또 걸었던 계단이지만, 이 계단은 한 번도 올라보지 않았던 낯선 계단이다. 마침내 계단 끝. 옥상으로 연결된 문을 열고 한 발짝 더 내디딘다. 아직 새벽 공기가 차다. 아파트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이 아침을 맞이하기 위해 하나둘 켜지고, 신문을 잔뜩 실은 오토바이가 밭은 숨을 몰아쉬며 아파트 입구에 서 있다. 거리에 나뒹굴던 쓰레기는 새벽 청소차 소리에 맞춰 하나둘 자취를 감춘다. 거실에 쓰러져 있는 소주병과 음식 받침대로 쓰던 입사원서엔 국물 자국이 어지럽다. 여전히 어느 한 곳에 발 딛지 못하고 부평초같이 떠다녔던 지난 3년. 엉킨 회로처럼 갈 곳과 머물 곳의 경계가 사라지는 순간. 또 다른 갈 곳을 찾아 허공에 발을 내디뎠다. 쌍용차 22번째 희생자 이윤형씨의 생이 마감되는 순간이었다.


얼굴 없는 영정들이 길 위에 늘어서 있다. 아니 얼굴 가린 영정이다. 입이 없어 하소연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눈이 없으니 매일매일 거리에서 벌어지는 경찰들의 살풍경을 보지 못한다. 귀와 코가 없으니 고막을 찢는 울부짖음이 들리지 않고, 짐승 같은 고약한 탄압의 냄새를 맡지 못한다. 얼굴 없는 이런 영정들이 24개나 된다. 경찰의 조롱과 발길질에 얼굴이 구겨진 채 후미진 곳으로 내쫓긴다.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는 이들이다. 이제는 편한 곳으로 가고 싶은 이들이다. 그러나 허락되지 않는다. 이승에서의 고단한 삶보다 저승으로 가는 길이 더 험하고 힘겹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는 그래서 얇지도 두껍지도 않다. 쌍용차 사태가 진흙탕에 빠진 채 공회전을 반복하는 동안 편안히 저승으로 넘어가야 하는 이들이 거리 위에서 매일 밤이슬을 맞고 있다. 새벽마다 얇은 경계의 막을 넘으려는 이들을 이제는 놔줘야 하는 게 아닌가. 쌍용차 문제 해결은 얼굴 없이 고단한 중천의 삶을 살아가는 이 영정들을 위해서라도 하루속히 이뤄져야 한다.


다시 마련된 대한문앞 쌍용차 분향소 (경향DB)


280일을 철탑에서 보내는 두 명의 노동자가 있다. 280일 동안 이들이 봤을 세상은 어떠했을까. 정부가 바뀌고 ‘을’을 위한다는 정치적 퍼포먼스가 연일 매스컴을 장식했다. 법을 강조하고 법치를 들먹인다. 그러나 ‘을’의 상징인 현대차 비정규직 문제는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아니 찾으려는 의지와 노력조차 없다. 오는 22일은 현대차가 대법원으로부터 비정규직 불법파견 판결을 받은 지 3년이 되는 날이다. 그러나 대법원의 “자동흐름 방식의 컨베이어 작업을 하는 현대차 사내하청은 불법파견”이란 판시는 조롱과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재벌에 의해 법이 농락당해도 이를 바로잡아 주는 이들이 없다. 정치권은 팔짱만 끼고 있고, 정부는 나 몰라라 방관했다. 마침내 지난 15일 현대차 아산공장 박정식 사무장이 자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철탑 위에서 이 사건을 전해들은 이들은 또 어떤 심정이었을까. 


절망과 푸념의 시대 희망버스가 다시 울산 현대차로 향한다. 출발지는 쌍용차의 이름 없는 영정들이 수난을 당하고 있는 대한문이다. 편하게 보내줘야 하는 이들이 있는 곳. 바로 이곳이 안전하게 가족의 품으로 내려와야 하는 이들이 있는 곳의 시작점인 것이다. 불법파견에 대한 현대차의 몽니가 계속되는 한 이번 희망버스도 큰 희망일 것 같진 않다. 그러나 끊임없이 희망의 두레박을 끌어올려야 하는 이유는 집에서 쫓겨난 이들을 가정으로 귀가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거리와 죽음과 반죽음의 경계가 있는 곳에서 살아가게 할 것인가. 철탑에서의 모진 시간을 이제는 끝내야 한다. 그들이 있는 가정과 그들이 일하던 공장으로 이제는 그들은 돌려보내 주자. 얼굴 없는 영정 24개를 끌어안고 4년을 거리에서 헤매고 있는 노동자의 간절한 바람이다.




이창근 | 쌍용차 해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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