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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흥하는 것도 순식간이지만 망하는 것도 순식간이라는 것이 역사의 증언이다. 20세기 한국의 역사는 세계사적 경이 그 자체였지만, 21세기 한국의 상황은 거의 모든 면에서 지탱하기 어려운 총체적 위기임이 갈수록 확실해지고 있다. 단적으로 빈곤, 출산, 비정규직, 자살, 노동시간, 가계부채, 복지, 분배율 등에서 세계 혹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악의 지표들이 급격히 늘어가는 것이 그 증거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그 같은 사회적 위험신호들이 10~20년째 깜박거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바꾸려는 사회적 의사결정이 전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방증이다. 계층·세대 격차에서 오는 사회갈등이 나라의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어 공동체를 뿌리에서부터 망가뜨리고 있지만, 우리의 정치는 20세기 중반에 형성된 냉전적 이념갈등과 20세기 후반에 나타난 지역갈등이 여전히 지배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한국 정치는 오직 시기심과 질투, 배신과 보복의 삼류 드라마를 쓰는 데만 몰두하고 있다.

도대체 한국 정치의 희망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은 틈만 나면 정치혁신을 외친다. 그러나 뭔가 제대로 바뀔 거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필자가 요즘 가장 자조하고 비통해하는 것은 다름 아닌 586이라 불리는 민주화세대의 실종이다. 586정치인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 세대집단 전체를 말하는 것이다. 자기 세대가 일군 민주화의 성과가 광기 어린 권력의 횡포 앞에 무참히 짓밟히고 말살되는데도 이들은 깊은 침묵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대는 원래부터 정체성이 명확한 집단은 아니었다. 군부독재에 저항했지만 민주화 직후 보수와 진보의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분화되었고, 한 세대로서의 뚜렷한 집합적 정체성을 표출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 민주주의와 노동의 추상적 가치에는 동의하지만 구체적 정책 사안에 이르면 개인의 이해관계를 우선하는 것이 이들의 특성이었다. 권위주의에 저항했지만 그 영향하에서 교육받고 자랐던 세대가 갖는 애증의 교차일지도 모르겠으나 이들은 항상 정체성이 애매했다. 그럼에도 586세대들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저항, 개혁, 진보와 같은 과도한 수사적 장식들이 꼬리표처럼 달려왔다.

필자가 볼 때 한국 정치가 걸어야 하는 마지막 희망은 청년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들 세대를 가리켜 ‘88만원 세대’라고 부르며 무기력하고 정체성이 없는 집단으로 묘사해 왔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전혀 다른 이야기다. 국 선거정치에서 청년세대의 파워는 매우 치명적이었다. 지난 15년 동안 한국에서 치러진 거의 모든 중대 선거는 강력한 세대구도로 나타났다. 지역주의나 이념대결이 선거에 미치는 영향은 완만하게 쇠퇴하지만 세대구도가 미치는 영향은 계속 증대해 왔다. 실제로 이들은 21세기 들어 한국 정치의 변화를 만들어 온 주역이었다. ‘노무현 바람’을 일으킨 것도 이들이었고, 촛불집회 이후 이명박 정권을 향한 심판 동력을 만들어낸 것도 이들이었다. 지난 대선을 강타한 ‘안철수현상’의 돌풍을 일으킨 것도 이들 세대였다. 이런 현상은 일본, 미국, 유럽 등 다른 나라에서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한국의 청년세대가 정치의식성이 강하고 뚜렷한 집합적 가치정체성을 형성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88만원 세대_경향DB


그럼에도 이들은 아직까지 정당·의회 영역에서 자신의 정치적 대표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1980년대 운동적 열정의 폭발에 의해 정치세력화된 586세대와 달리 청년세대들은 일상적 삶의 실질적 문제로부터 정치세력화의 토대를 닦아야 하기에 그 속도는 느리고 더딜 수밖에 없다. ‘안철수현상’은 구시대 패러다임을 넘어서기 위한 청년들의 집합적 의지가 우회적으로 투영된 최초의 사건이었다. 물론 그 최초의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이제부터 본격적인 실험들이 줄기차게 일어날 것이다. 그것이 줄기차게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청년세대의 정치적 에너지가 커다란 풀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년세대들은 과거의 낡은 패러다임과 단절한 세대이며, 새로운 시대의 합리적 가치를 체득한 집단이다. 카이스트(KAIST) 주최 토론회에서 박성원 박사가 발표했듯이 우리 청년들은 기성 시스템을 잘 유지하고 관리해 나가는 것보다는 붕괴시키고 새롭게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가 살아남으려면 당연히 절망을 키워가는 현재의 시스템은 붕괴시켜야 한다. 오직 청년들만이 이런 진실을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국가공동체를 위기에서 구하려거든 청년정치에 집중 투자해야 한다. 지금까지처럼 그들을 동정과 시혜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한국 정치의 주도자로 나서도록 제도적 기반을 정비하고 그들에게 아직은 부족한 지혜와 경륜과 자원을 빌려줘야 한다. 그리하여 청년층을 선두로 비정규직과 공동체 시민들이 굳건하게 연대하는 새로운 정치세력 기반이 만들어져야 한다. 전쟁 및 산업화시대와 민주화시대에 형성되어 고착된 낡은 보수와 진보의 세력 기반을 파괴하고 대체하는 세력교체야말로 진정한 혁신의 본질이자 완성인 것이다.

고원 | 서울과기대교수·기초교육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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