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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꿈같다. 그 겨울에 어린 딸의 손을 잡고 광화문광장에 처음 나갈 때만 하더라도 이런 날이 올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남과 북이 당장이라도 전쟁을 벌일 것 같았는데, 그 사이 남북 정상이 세 번이나 만났고, 13년간 직접고용을 외치며 투쟁하던 KTX 승무원들, 9년간 복직을 외치던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이 직장으로 돌아간다. 그런가 하면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러 국민에게 상처를 주었던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이 감옥에 가거나 재판 중에 있다.

이 모든 일이 꿈이라면 깨고 싶지 않을 지경이지만, ‘그래서 세상이 변했니?’라고 묻게 되는 일도 자주 일어난다.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최근 들어 자주 듣게 되는 ‘소확행(小確幸)’이란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작지만 일상에서 확실하게 실현 가능한 행복, 또는 그런 행복을 추구하는 삶의 경향성을 이른다. 이것은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수필집에서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는 것,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넣은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 새로 산 정결한 면 냄새가 풍기는 하얀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쓸 때의 기분”이 자신이 느끼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의 감정이라고 한 데서 유래하게 되었다. 이런 라이프 스타일을 ‘인생은 한 번뿐(You Only Live Once)’이란 말을 줄여서 ‘욜로’라고도 한다.

이런 사회적 경향은 애초부터 출발선이 다른 사람, 도저히 쫓아갈 수 없을 만큼 격차가 확연히 벌어진, 불평등이 고착된 사회의 반증이기도 하다. 대학졸업과 동시에 신용불량자의 삶이 확정되는 이들에게 멋진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 오늘을 희생하며 먼 미래를 위해 살아가라는 성장시대의 동기를 부여한들 더 이상 속을 사람도 없다. 한 번뿐인 인생인데 실현하기 어려운 소망을 품고 살면서 괴로워하는 대신, 오늘이나 내일쯤 당장 실현가능한 소소한 행복을 추구하며 살겠다는 자기위안과 행복을 탓할 수 없다. 도리어 노동중독사회에서 게으를 권리까지 권하지는 못하더라도 일과 삶의 균형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을 추구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며 권할 만한 인생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미투(Me too)’를 경험하면서 새롭게 알게 되고, 새롭게 느끼게 된 깨달음이 하나 있다.

그중 하나는 고발당한 사람들만 고발된 것이 아니라 나도 누군가 타인에게는 살아있는 권력이고, 잠재적인 위협이며 공포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촛불혁명’ 직후 시작된 ‘미투혁명’은 잘못된 최고 권력자 하나 사라진다고 해서 일상의 민주주의가 저절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함께 촛불을 들고, 더불어 진보를 말하고, 소셜미디어 프로필 이미지에 세월호 추모 이미지를 달고 있는 우리들 역시 일상에서 어느 순간 갑자기, 또는 지속적으로 1차 가해자가 되고, 2차 가해자가 될 수 있다. 소소하게는 직장에서 누군가 잘되게는 할 수 없어도 못되게 할 수 있는 힘이 있고, 자동차 운전대를 잡으면 길 앞의 여성운전자에게 시시때때로 욕설과 비난을 가할 수 있다. 또 그와 반대로 한순간의 분노와 실수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공공연한 조리돌림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모두가 미워하고 싫어하는 큰 권력을 비판하기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잘못된 큰 권력이 사라졌다고 해서, 그것을 비판하던 사람들이 저절로 정의로운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위협하는 우리 일상의 ‘소소하지만 확실한 불행’을 외면하고, ‘소소하지만 확실한 불의’를 방치하고도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을까. 그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우리 모두 행복해지려고 노력하지만, 행복해지기 어려운 까닭이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법은 오직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철학자 카를 마르크스의 테제이고, 다른 하나는 ‘인생을 바꿔야 한다’는 시인 아르튀르 랭보의 테제다. 세상과 일상의 변화라는 두 가지 테제 중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한다면 ‘틸틸’과 ‘미틸’이 그토록 열심히 찾아 헤맸던 파랑새는 우리 곁에 머물 수 없다.

<전성원 |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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