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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인들이 아무리 좋은 시를 짓더라도 세상 속물들은 그것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태백이 친구 왕십이(王十二)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것(시)을 듣고 모두 고개를 흔드니 이는 마치 동풍(봄바람)이 말 귀에 듦과 같음이라.’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마이동풍(馬耳東風)의 유래입니다.
말의 귓가에 미려한 시구를 읊어준들 미련한 말이 무엇을 알겠습니까. 그저 숨결이 귀에 드니 고개 흔들어 간지럽다 하겠지요. 이 마이동풍과 같은 속담으로 ‘소귀에 경 읽기’가 있습니다. 아무리 가르치고 일러주어도 알아듣지 못하거나 건성으로 듣는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힘들다, 괴롭다 하소연을 합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해법을 구합니다. 하지만 사람도 역시 미련한 동물이라서 당장은 솔깃하게 귀 기울이지만 대개는 거기서 끝입니다.
조언을 듣고 나서의 행동이 그 사람의 자질이라는 말을 합니다. 될 사람인지 아닌지 말입니다. 그 자리에서는 맞아, 맞아 공감하고 손뼉을 치지만 전혀 실천하지 않는 이, 고개 끄덕여 들어놓고 시간 지나면 잊어버리는 이, 애초에 하소연이 목적이라 건성건성 듣는 이들이라면 그 어떤 조언도 소귀에 읽은 경전에 불과할 뿐이겠지요.
무예를 익히려 스승을 찾아가면 3년 동안 물 긷고 밥하는 것만 시킨다는 이야기가 유명합니다. 힘든 무도의 길을 걸을 만한 자질을 갖추었는지 알아보기 위한 것이지요. 그래서 어떤 이들은 조언을 섣불리 하지 않고 오래 뜸을 들이며 딴 얘기를 한다고 합니다. 화를 벌컥 내고 가버릴 사람이라면 굳이 아까운 시간을 들일 만큼 다급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당의정(糖衣錠)이 아닌 약은 쓴맛을 각오한 이만 맛볼 수 있습니다. 무엇이 절실한지조차 모르는 이에게는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조차 고개 흔들게 하겠지요. 답을 듣는 귀는 마음에 있습니다.
<김승용 |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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