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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최근 한 주 정부의 구성을 둘러싼, 예상치 못한 투표결과로 독일이 시끄럽다. 옛 동독지역에 속한 튀링겐주의 주지사를 선출하는 투표에서 극우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과 보수당인 ‘기민당’의 지원으로 소수당인 ‘자민당’ 후보가 제1당인 ‘좌익당’의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극우정당이 이제 정치의 결정권을 쥘 수 있게 되었다는 충격은 1932년 선거에서 나치가 정권을 합법적으로 장악했던 악몽까지 떠올리게 하였다. 안팎의 강한 압력으로 당선자는 결국 자진해서 사퇴했고, 메르켈 총리의 후임자로서 차기 수상후보로 지목된 크람프카렌바워도 기민당의 당대표 직을 사임하였다. 

문제의 핵심은 극우정당이 과거 나치처럼 다시 독일정치를 좌우할 수도 있다는 데 있지 않다. 통일 이후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정치 상황이 과거 나치가 집권할 수 있었던 바이마르공화국 말기와는 다르게 안정상태라는 사실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아직도 상실감에 시달리는 옛 동독 주민의 일반적 심리를 고려하더라도 이러한 이변은 독일에서 기민당이나 사민당과 같은 전통적 ‘국민정당’이 대중적 기반을 잃어가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이른바 중도적 정치세력의 위기다. 동시에 이는 극우 포퓰리즘에도 기회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프랑스 정치에서 이미 상수(常數)가 된 극우 ‘국민전선’은 마크롱이 시도하는 연금개혁을 둘러싸고 첨예화된 사회적 갈등에 힘입어 현재 마크롱과 거의 비슷한 지지율을 얻고 있어 내년 초로 예견된 대통령선거에서 마린 르펜이 당선될 가능성은 커졌다. 2018년 1월부터 시작된 연금개혁을 반대하는 ‘노란 조끼’의 격렬한 투쟁은 프랑스의 시민혁명이 남긴 또 다른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 반동들의 지배력을 약화하기 위해 당시 혁명주도세력은 직업선택의 자유를 억압했던 직종연합을 해체했다. 이로 인해 개인들은 자유롭게 되었지만 이들 사이의 연결고리도 함께 약화하였다. 이런 역사적 배경이 역설적으로 사회적 갈등의 해소가 쉽게 거리의 투쟁으로 연결되도록 만들었다.

역사적이거나 문화적 요소가 정치행태에 주는 영향력을 강조하는 정치문화의 대표적인 연구로 알몬드와 버바가 1960년대 초에 발표한 미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멕시코에 관한 비교연구가 있다. 이 연구에서 이른바 ‘참여형’의 정치문화를 염두에 둔 영미의 정치문화도 ‘브렉시트’를 둘러싼 혼란이나 트럼프의 등장이 보여주듯이 포퓰리즘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구화가 몰고 온 충격은 선진산업국 사이에 있었던 기존의 정치문화적 차이도 크게 좁혔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통적인 대의정치와 지배엘리트에 대한 불신, 사회경제적 낙오자는 물론 중산층의 불안과 불만, 이민자나 이주자에 대한 혐오, 민족주의 등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구성된 포퓰리즘은 이제 주로 남미에서 볼 수 있는 정치문화는 아니다. 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빛을 발한 아르헨티나의 페론주의를 시작으로 거의 전 남미에 번진 포퓰리즘은 베네수엘라의 차베스나 브라질의 룰라로 상징되었던 좌익 포퓰리즘이 왜곡된 경제구조와 빈부 격차의 혁파를 내세우고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현재 극우적 성향을 띠고 있는 동유럽의 포퓰리즘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런 포퓰리즘의 증후는 그러나 동아시아의 정치문화권에서는 그렇게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여기서도 빈부 격차나 지배계급의 부정부패나 억압체제가 종종 국민의 강한 저항을 일으키고 정권교체도 가능했지만 오랜 권위주의, 연고주의나 지역주의의 전통이 오히려 포퓰리즘의 강한 집단주의에 기반을 둔 폭발력을 약화시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포퓰리즘은 우리말로 ‘대중(영합)주의’ 정도로 번역되지만, 이는 포퓰리즘의 전반적 내용에 적합한 단어는 아니다. 중국에서는 ‘민수주의(民粹主義)’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이 역시 원래의 의미에 합당한 번역은 아니다. 

그런데 이런 단어가 몇 년 전부터 우리 사회에도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된다. 주로 ‘복지 포퓰리즘’을 둘러싼 논쟁 때문이다. 한편에서는 무책임하게 복지를 늘리는 정책은 ‘좌익 포퓰리즘’에 불과하며 이로 인해 한국도 머지않아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꼴이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비록 지난 몇 년간 복지를 위한 재정지출이 가파르게 상승했지만 복지 분야의 지출은 OECD 국가 가운데 여전히 최하위권에 속한다고 주장하면서 복지와 포퓰리즘을 연결하는 주장을 터무니없다고 반박한다. 

한국 사회의 정치문화는 현재 카를 마르크스와 막스 베버를 구별할 수 없거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동일시했던 과거의 수준은 아니다.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를 개선하려는 정책을 단순히 ‘빨갱이’의 정책으로 거칠게 내몰 수 없는 상황에서 복지 포퓰리즘을 들먹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세금폭탄’ ‘미래세대의 짐’ ‘공짜 복지’ ‘국가재정의 파탄’과 같은 선정적인 단어로 나열된 비판을 들을 때 나는 현재 힘을 받는 폴란드의 우익 포퓰리즘을 공격할 때 바웬사가 사용하는 같은 내용의 문구를 동시에 떠올리게 된다. 

머지않아 국회의원 선거가 있다. 복지 포퓰리즘을 둘러싼 논쟁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 가열되겠지만 결국에는 내용 없는 공론으로 끝날 가능성도 있다. 신자유주의의 격랑 속에서 침몰하는 배의 난간에 겨우 매달린 사람들의 고통을 생각하는 정책이 복지 포퓰리즘으로만 계속 매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도 선행을 행사하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지 않고, 누구도 자신의 존엄을 보여줄 수 없을 정도로 비천하지 않다”는 이탈리아의 신경과 의사며 인류학자 파올로 만테가차(1831~1910)가 남긴 말이 그래서 생각난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학교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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