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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기능성자기공명영상(fMRI) 연구에 참여했던 학부 시절, 뇌 영상 결과를 분석하다 전장(claustrum)이란 낯선 뇌 영역이 활성화된 것을 발견했다. 이 결과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살펴보려고 논문을 읽다가 내 눈을 의심했다. 논문의 1저자가 프랜시스 크릭이었기 때문이다. 설마 이 크릭이 DNA 구조를 발견한 그 크릭일까? 교과서에서나 보던 사람의 논문을 내가 읽었다니, 들뜨고 신기해서 찾아보았다. 진짜 ‘그’ 크릭이었다. 크릭이 분자생물학 연구에서 뇌에 대한 연구로 방향을 전환했다고 하더니 정말인 모양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논문 출간 연도였다. 프랜시스 크릭은 1953년에 DNA의 구조를 발견했고, 이 공로로 1962년 노벨 생리학상을 수상했다. 내가 읽은 논문의 출간 연도는 2005년이었다. 실험과 분석의 대부분을 수행하고, 논문의 대부분을 직접 작성했을 때나 논문의 1저자가 될 수 있으니, 크릭은 80이 족히 넘었을 나이에도 연구를 계속했던 것이다. 그것도 직접. 허연 머리로 실험실을 오가며 연구하는 크릭을 상상하니 어쩐지 귀엽다는 생각과 함께 묵직한 감동이 일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 사람마다 다른 인지력 감퇴
모든 사람이 나이가 들면서 젊었을 때보다 인지 능력이 감퇴하지만, 그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나이 80이 넘어서도 크릭처럼 왕성한 인지 능력을 가지고 있고, 어떤 사람은 70도 되기 전에 일상생활에 어려움이 생길 만큼 인지 능력이 감퇴하기 시작한다.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나는 걸까?
첫째, 사람마다 살면서 축적해 온 신경자원의 양이 다르다. 신경자원이란, 신경세포의 수, 시냅스의 밀도처럼 물리적인 구성물의 양과, 가지고 있는 구성물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식을 뜻한다. 신경자원은 유전적인 영향도 받지만, 경험에 따라서도 크게 달라진다. 예를 들어 새롭고 다양한 경험과 교육은 신경세포의 숫자를 늘리고 시냅스의 밀도를 높여준다. 자기 분야에서 전문성을 갈고닦는 일도 도움이 된다. 전문성을 훈련하는 과정을 통해 풍성하고 세분화된 개념들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문성을 쌓을수록, 전문 분야의 문제를 다룰 때는 뇌 영역들의 활동이 종종 줄어든다고 한다.
그 밖에, 공부를 오래 해오고 신체적인 운동량이 많을수록, 건강하게 먹고 스트레스가 적을수록 축적된 신경자원의 양이 많은 경향이 있다. 대부분의 신경자원은 젊었을 때 축적되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해서 새로 생길 수 있으므로 외국어 공부 등 지적인 활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 신경자원을 보수하고 유지하는 정도가 사람마다 다르다. 신경조직이 손상되거나 감퇴하는 속도가 수선되고 보충되는 속도보다 느리면 신경자원의 양이 점차 줄어들면서 인지 능력의 후퇴로 이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뇌영상 연구에서는 만 65세 이상 노인들의 뇌 구조와 기억의 회상 능력이 4년 동안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살펴보았다. 연구자들은 4년 동안 해마의 부피가 줄어든 정도가 작을수록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회상하는 능력이 감퇴하는 정도가 적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신경자원을 유지하는 능력은 유전적인 요인의 영향도 받지만 건강한 식사, 운동, 지적이고 사회적인 활동의 참여와 같은 경험적인 요인의 영향도 받는다. 특히 운동은 멀리 떨어진 신경세포들을 연결하는 신경섬유들이 많이 모인 부위인 백질의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 다양한 방식의 보완
어려운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는 같은 뇌도 기존과 다르게 사용함으로써 부족한 측면을 보완할 수 있다. 나이가 들면서 기능이 감퇴한 고령의 뇌에서는 이러한 보완이 활발하게 일어난다. 예를 들어 고령의 뇌에서는 같은 영역을 젊은 사람보다 더 많이 활성화시켜서 뇌 기능의 감퇴를 보완하는 현상이 자주 관찰된다고 한다. 젊은 사람의 뇌에서도 어려운 문제를 풀 때 쓰던 뇌 영역을 더 많이 활용하는 일이 일어나지만, 기능이 감퇴한 고령의 뇌에는 비교적 쉬운 문제를 풀 때도 이런 현상이 더 자주 일어난다.
기존에는 쓰지 않던 뇌 영역을 동원해서 보완하는 방법도 있다. 어려운 문제를 풀기 위해 사용하지 않던 뇌 영역을 추가로 끌어다 쓰는 것은 젊은 사람의 뇌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떤 영역이 동원되는지는 각자가 가진 신경자원의 보유량에 따라 다를 것이라고 추론되고 있다.
끝으로, 뇌를 기존에 사용하지 않던 방식으로 재구성해서 보완하는 방법이 있다. 예를 들어서 우뇌보다는 좌뇌가 언어 능력에서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뇌졸중으로 좌뇌가 손상되어서 실어증에 걸렸을 때, 원래라면 언어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 우뇌를 사용해서 언어 능력의 보완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고령자들은 좌뇌와 우뇌를 함께 사용하는 경우가 젊은 사람보다 더 많다고 한다.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면, 고령의 뇌도 새로운 방법들을 시도하면서 활기차게 작동하는 것이다.
■ 건강한 나이듦
내가 읽은 전장에 대한 논문은 크릭이 세상을 떠나는 날 편집해서 보낸, 그의 마지막 논문이라고 한다.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고 해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을 그대로 실천하고 간 셈이다. 세상을 탐구하고 자기 몫을 다하는 과정을 진심으로 즐기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구의 대부분이 고령자인 시대는 인류에게 처음이다. 고령화는 지금부터 신경자원을 차곡차곡 축적해가야 할 젊은이들에게도, 신경자원을 잘 유지하고 보완해야 할 나이 든 이들에게도 도전이다. 크릭처럼 나이가 들어서도 자기 일을 즐기는 태도와 꾸준히 일할 수 있는 여건이, ‘철밥통’만 좇도록 내몰리는 청년들을 위해서도, 건강한 나이듦을 위해서도 필요할지 모르겠다.
<송민령 | 카이스트 바이오 및 뇌공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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