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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하게도 우리나라 헌법에는 기본권 조항에 모두 주어가 있다. 미국도, 독일도, 일본도 기본권 조항에 일일이 주어를 넣지 않았다. 학문, 예술, 표현의 자유를 규정한 조항을 보면 외국 헌법에는 딱히 주어가 없고, 간혹 있어도 ‘모든 사람’이다. 독일 헌법은 “예술과 학문, 연구와 강의는 자유이다”이고, 일본 헌법도 “학문의 자유는, 그것을 보장한다”이다. 우리 헌법만 국민을 주어로 적어 “모든 국민은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고 했다. 한국에서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보장받으려면 국민이어야 한다. 실제로 한국의 기본권 주체는 국적자이며 외국인은 제외된다고 임기 내내 주장한 헌법재판관도 있다.

이렇게 독특한 구조는 일본이 1945년 패전 전까지 쓰던 대일본제국 헌법(메이지헌법)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1889년 만들어진 메이지헌법은 일왕이 일본 신민에게 장려하는 형식이다. 그래서 헌법 조항마다 일본 신민이라고 일일이 주어를 넣었다. 가령 “일본 신민은 법률의 범위 내에서 거주 및 이주의 자유를 갖는다”는 식이다. 그리고 일본을 점령한 맥아더 사령부가 1946년 만든 일본 헌법 영문 초안은 “학문의 자유는 보장된다(Academic freedom is guaranteed)”이다. 미국 헌법과 마찬가지로 주어는 없다. 하지만 일본 관료들은 일왕의 존재를 의식해 메이지헌법처럼 국민이란 주어를 넣어 번역했다. 일본어로 번역된 헌법을 받아본 맥아더 사령부는 주어인 국민을 빼라고 했다. 이에 일본 관료들은 “학문의 자유는 보장된다”고 하면, 일본에서는 문제가 발생할 경우에만 보장되는 것으로 오해된다고 했다. 그래서 ‘학문의 자유는, 그것을 보장한다(學問の自由は、これを保障する)’는 어색한 문장이 됐다.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 펄럭이고 있는 헌재 휘장. 경향신문 자료사진

우리나라 헌정사도 70년을 넘었고 헌법재판소가 문을 연 지도 30년이 됐다. 일상에 헌법이 스며들어 누구라도 위헌, 합헌이라고 말하는 사회가 됐다. 하지만 헌법은 자신의 이익을 쟁취하는 데 자주 동원된다. 정적을 제거하고 상대 정파를 제압하기 위해 근거 없이 헌법을 들먹인다. 법원과 헌재가 이런 정치적 시도를 승인하기도 한다. 터무니없는 이론을 만들어내고 자의적으로 해석한 외국 판례를 근거로 든다. 이렇게 연원이 불분명한 헌법조항부터 자의적인 외국 사례 해석까지 더해져 헌법은 갈등을 부추기기도 한다. 우리는 불의한 대통령을 탄핵한 나라이기도 하지만, 사법농단을 벌인 대법원이 나서 자신들이 재판부를 구성해야 헌법에 맞다고 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21세기 들어서 세계의 헌법정신은 하나로 수렴하고 있다. 인권은 국가문제가 아니라 지역문제이고 세계문제가 됐다. 유럽인권재판소처럼 한 나라 최종심 판결을 뒤집는 지역인권보장 체제가 자리 잡은 지도 오래다. 유엔이 만든 각종 인권규약이 재판의 중요한 근거로 쓰이고, 외국 판례를 판결에 인용하는 경우도 흔하다. 경향신문은 현재 세계의 인권기준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주요 국가 헌법재판소를 취재했다. 이를 통해 우리의 인권 수준을 확인하고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서다. 조만간 시작하는 연속 인터뷰에서 다양한 세계의 의견을 소개할 예정이다. 세계 양대 헌법재판기구인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과 독일 헌법재판소 재판관을 인터뷰했다. 1920년 세계 최초로 세워진 오스트리아 헌법재판소 소장, 아파르트헤이트를 종식시키고 가장 선진적인 헌법을 만들어낸 남아프리카공화국 헌법재판관, 대법원과의 오랜 다툼을 극복해가고 있지만 다시 유럽인권재판소와 갈등하고 있는 이탈리아 헌법재판소 재판관 등을 만났다.

이 가운데 미국 연방대법원을 대표하는 진보 이론가인 스티븐 브라이어 대법관은 “사법의 역할은 문헌을 파고드는 해석이 아니라 헌법에 담긴 인민(people) 의지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저서 <역동적 자유> 등에서 말해온 인물이다. 대표적인 문헌주의자 앤터닌 스캘리아 전 대법관을 정면에서 반박해온 브라이어 대법관은 지난 25년 대법관으로서 확립한 ‘민주주의 헌법을 해석하는 방법’을 한국 독자들에게 설명해줄 예정이다. 세계의 관심사인 도널드 트럼프 정권에서의 대법원 역할에 대해서도 말한다. 이 밖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헌법재판관들이 자신들이 겪어온 경험과 고민을 공개했다.

헌정사 70년인 우리 헌법과 재판이 글로벌 스탠더드에 뒤떨어지는 이유 중 우리의 제한된 경험이 있다. 일본 메이지헌법은 나름 일본의 역사와 체제를 반영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와 현실에 대한 고민 없이 모방했고, 그러다 보니 어디를 고쳐야 하는 건지 파악도 못하고 있다. 19세기 일본은 자신들에게 걸맞은 헌법과 제도를 갖추려 열성으로 외국을 연구했다. 독일, 프랑스 등을 다니며 일본이 어디쯤 있는지 확인했다. 우리는 지나치게 우리를 믿어왔다. 민주화와 산업화를 함께 달성했다는 얄팍한 성과를 너무 오래 믿었다. 우리는 대통령이 탄핵되어 감옥에 가고, 법원 판결은 거래되는 오염된 나라다. 인권과 행복을 지키기 위해 ‘또 다른 헌법의 풍경’을 음미해야 할 시간이다.

<이범준 사법전문기자 seirot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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