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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테파파. 한 손엔 커피를 들고, 한 손으론 유모차를 밀며 육아하는 아빠를 뜻하는 이 말은 우리 사회에서 최근 몇 년간 급속히 확산된 유행어로 꼽힐 만하다. 지난달엔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가 북유럽 순방 직전, 그리고 순방 일정에서 라테파파들을 만나는 장면이 보도되며 다시 한번 ‘라테파파들’이 조명받았다. 재원 다각화 등 아빠 육아휴직의 사각지대를 줄이기 위한 논의도 활발하다니 참 반갑다.  

안 회그룬드 주한 스웨덴 대사는 “잦은 해외 출장 때는 남편이 집안일을 전담했다”고 말했다. 그는 “스웨덴에서는 부모 모두가 일하는 것이 당연하고, 남녀의 고정 역할도 없이 필요에 따라 부담을 조정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했다. 송현숙 기자

경향신문은 지난해 4월 ‘라테파파의 나라에서 띄우는 편지’라는 제목으로 저출산의 스웨덴식 해법을 5회에 걸친 기획기사로 실었다. 취재는 필자가 맡았다. 우연한 기회에 스웨덴에서 1년을 생활하면서, 어디서나 마주치는 육아하는 남자들이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 없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추울 때나 더울 때나, 공원, 카페, 도서관, 거리, 마트 등에서 아이들과 함께 출퇴근하고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아빠들의 모습에 반했다. 당시 기사를 요약하면, 스웨덴도 한두 세대 전엔 한국과 비슷한 가부장적 사회였지만, 사회의 방향을 바꾸려 결심하고 철저한 계획과 의지로 실천하다 보니 어느새 세계가 부러워하는 성평등 사회를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지난달 12일 스웨덴 스톡홀름에 위치한 ‘어린이박물관’에서 한 아빠가 아이들과 책을 보고 있다. 한국에서는 휴일에 주로 보는 풍경이지만 스웨덴에서는 평일 오후 일을 마친 ‘라테파파’들이 아이들을 돌보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 박용하 기자

수많은 댓글 중 아직까지 기억나는 것이 있다. 워킹맘들은 날마다 동동거리며 살고 있는데, 왜 라테파파들만 칭찬받느냐는 불만이었다.  

연관검색어나 관련 이미지만 찾아봐도 두 단어의 차별적 지위를 실감할 수 있다. 라테파파는 여유 있는 파란 하늘, 봄날의 이미지다. 워킹맘은? 촉박한 시간 집 안팎의 일에 치여 땀에 젖은 여름이 떠오른다. 

한두 세대 전 한국과 비슷했던 스웨덴의 정책 지향은 분명했다. 남녀 모두에게 노동자와 부모로서의 역할이 똑같이 중요하다는 생각과 이를 위한 시스템의 구축이었다. 집 밖에선 남녀 간의 고용률과 임금격차 해소, 집 안에서는 동등한 가사와 육아 분담을 실현하려 끈질기게 노력하고 결과를 추적했다. 부모로서, 노동자로서 누릴 권리와 의무를 얘기하니, 남녀 성별의 문제가 아닌, 사회 전체가 풀어야 할 과업이 됐다. 

우리 사회는 어떤가. 몇 년 새 라테파파는 유행어가 될 만큼 주목받았지만, 워킹맘의 문제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현실에선 일하는 여성들이 급속히 늘고 있다. 지난해 전체 부부 중 맞벌이 부부는 46.3%를 차지했다. 관련 통계가 집계된 2011년 이후 최고치였다는 발표가 지난주에 나왔다. 그러나 여성들의 노동현실은 척박하다. 불평등 지표 ‘부끄러운 세계 1위’라는 중계만 계속될 뿐, 이를 개선하기 위한 실천적 고민은 뒤따르지 않는다. 

지난 3월8일 세계여성의날을 맞아 영국 경제지 이코노미스트가 발표한 2019년 ‘유리천장 지수’에서도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9개 회원국 중 꼴찌를 기록하며 또 한번 굴욕을 되풀이했다. 100점 만점에 20점을 겨우 넘겨 평균 60점을 크게 밑돌았다. 스웨덴은 80점 이상의 점수로 1위였다. 특히 한국은 노동과 관련된 지표가 압도적으로 나빴다. 여성과 남성의 임금격차는 34.6%에 달했다. 여성의 기업 이사 비율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2.3%에 불과했다. 평균(22.9%)은 물론, 28위인 일본(6.4%)과도 큰 차이가 났다.

지난 1일부터 오는 7일까지는 제24회 성평등주간이다. 지자체마다 성평등주간 행사가 열리고 있는 가운데, 서울시는 올해 주제를 일하는 여성으로 잡았다. 지난 1일 서울시청에서는 ‘성평등 노동시장을 위한 법제도 개선 및 정책 제안’ 제목의 토론회가 열렸다. 이날 초청 특강을 한 조앤 윌리엄스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명예교수는 이상적인 노동자상이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실질적인 지표들을 제시했다. 김영미 연세대 교수는 기업들에서 벌어지고 있는 남녀 노동자들의 불평등 노동의 풍경을 전하며, 기업의 변화를 주문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뜻깊고 유익한 자리였다. 한 가지 아쉬움은 정작 이 얘기를 함께 듣고 변화를 모색해야 할 남성 청중들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지난해 스톡홀름에서 열린 ‘스톡홀름 성평등 포럼’ 참여자의 중요한 한 축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남성 집단이었다. 국제무대의 남성 고위인사들, 육아와 가사 참여를 독려하는 국제 아빠단체 회원들, 각국에서 성평등 포럼을 찾은 정책 담당 공무원들. 포럼에서 만난 이들은 “성평등은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남녀 공동의 적은 가부장제이며 남성도 희생자” “페미니즘은 평화로운 공존과 번영을 위한 국제기준”이라고 역설했다.  

정작 ‘라테파파’의 종주국 스웨덴에선 ‘라테파파’라는 용어를 잘 몰랐다. 라테파파들을 취재한다는 사실을 신기해했다. ‘원래 아이들은 같이 키우는 거 아닌가, 당연한 얘길 뭘 기사까지 쓰나’라는 반응이었다. 모든 엄마가 일하니 워킹맘이라는 단어도 없고, 모든 아빠가 아이를 키우니 라테파파라는 단어도 딱히 쓰지 않는다. 단어는 없지만 사회는 워킹맘, 라테파파에 최적화된 시스템을 구축해 놓았다. 

사회는 남녀의 날개로 난다. 양 날개를 활짝 펴야 높이 날 수 있다. 우린 어떤가.

<송현숙 전국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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