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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 김원봉 의열단장에 대한 논란이 많다.  그래도 독립운동사에서는 산(若山)이 되어 한 산맥을 이루었는데 “6·25의 원흉” “6·25 남침에서 핵심역할” “6·25전쟁의 1등 공신으로 훈장을 받았다” 등으로 공격한다. 자유한국당 민경욱 대변인은 “북한 정권 수립의 공훈자 (중략) 한국전쟁 중 대한민국 국군을 많이 죽인 대가로 김일성 훈장을 받”았다고 했고, 같은 당의 황교안 대표는 독립군을 괴롭힌 간도특성대 출신 백선엽 장군을 찾아가 약산을 “6·25 남침의 주범 가운데 한 명”이라고 했다. 문화일보는 사설에서 “6·25 남침에도 공을 쌓았다고 해서 훈장까지 받았다”고 단정했다. 

약산이 6·25전쟁의 주범이고 원흉인가? 소련 극동전선군 제88독립보병여단의 애송이 대위였던 김일성은 빨치산 동료들을 감시·보고하는 프락치 역할로 소련 군부의 신임을 얻어 1945년9월 초 스탈린에 의해 북한 지도자로 발탁되었다. 그 여단은 만주 빨치산 출신 조선인들로 구성됐다. 나중에 김일성이 북한 실세가 됐을 때 이들은 북한의 핵심세력이 된다. 약산은 1948년 4월 남북 협상으로 늦게 북으로 갔다. 9월 북한 내각 구성을 보면 그는 군이나 당 실권에서 밀려나 명목상 한직인 ‘국가검열상’이 되었다.

약산 김원봉

김일성은 빨치산 출신의 인민집단군총사령관인 최용건에게 ‘민족보위상’을 맡김으로써 군의 실권을 쥐게 했다. 유성철에게는 인민군 작전국장을 맡겼다. 소련은 김일성도 믿지 못해 소련에 있는 고려인 200여명을 5차에 걸쳐 북한으로 데려왔다. 이들을 소련파라 한다. 북한에서는 빨치산을 거친 제88여단 출신과 소련파가 핵심 요직을 장악했다. 김일성은 1950년 3월30일~4월25일 박헌영과 함께 스탈린을 찾아가 남침 허가를 받고, 5월에는 중국의 마오쩌둥을 만나 2~3주 안에 남한 점령을 끝낼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 후 소련 군사고문단이 남침작전 계획을 인민군 총참모장 강건에게 넘기면서 비극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약산은 북한에 자신의 세력이 없었다. 조선의용대 출신들은 해방 후 거의 다 흩어졌고, 한글학자로 정치력이 없는 김두봉의 연안파와 협력하지만 그 핵심세력에 밀렸다. 나중에 인민공화당으로 독자세력을 구축했으나 김일성 세력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끝까지 ‘조선로동당(공산당)’에는 가입하지 않았다. 이러한 북한의 정치판도에서 약산은 “전쟁의 원흉”이 되고 전쟁에 참가하여 “국군을 많이 죽일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1952년 3월19일 공훈을 받은 것은 ‘국가훈장 1급 최고훈장’이 아니라, 1951년 조선인민공화국 군사위원회 평북도 전권대표로 있을 때 평북지역의 보리 파종 실적이 우수하다고 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두봉이 준 ‘로력훈장’이다. 

전쟁이 나면 남한에 잔존한 남로당 20만명이 대환영할 것이라 장담했던 박헌영의 말이 공수표가 되어버리자, 김일성은 박헌영에게 전쟁 실패의 책임을 뒤집어 씌우고 평양에 있는 ‘미제 간첩’이라는 죄목을 붙여 처형했다. 약산은 신변의 위협을 느껴 탈북하려다 발각돼 역시 중국 장제스의 ‘간첩’이라는 죄명으로 숙청되었고, 가족 모두 사라졌다. 약산의 죽음은 아무도 모른다. 

20대 초반부터 조국 해방과 독립을 위해 활동한 약산이다. 서슬 퍼런 일제가 최고의 현상금을 걸고 수십년간 뒤쫓았으나 그는 산같이 흔들림이 없었다. 그런 약산을 우리 동포가 모독하고 있다.

<박의영 | 목사·박문희 박차정 의사 유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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