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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직설

수경 누나에게

opinionX 2019. 10. 1. 14:19

누나가 떠난 지 1년이 되었네. 금세이기도 하고 어느덧이기도 한 1년이었어. 금세 잊을 수 있을 것 같으면서 어느덧 눈앞에 나타나는 순간들이 많았네. 그 순간마다 누나의 희미한 웃음이 있었어. 예전에는 그 웃음이 희미한 줄도 몰랐었네. 힘없는 웃음이, 그러나 새어 나올 때마다 웃는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던 그 웃음이, 실은 희미한 웃음이었어. 희미해서 오히려 여운이 길었어. 사람들은 어렴풋해지는 것을 어떻게든 붙들려고 하잖아.

누나가 떠난 날은 개천절이었어. 하늘이 열린 날, 누나는 하늘에 올라가 무엇이 되었을까. 별처럼 빛나고 있을까, 달처럼 한 달에 한 번씩 모양을 바꿀까, 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올랐다가 새털처럼 한없이 가벼워지기도 했을까. 누나는 왠지 이런 말을 해줄 것 같다. “달의 모양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는 거야. 한없이 깜깜해지고 싶은 날, 월식이 찾아오는 것처럼.” 그래서 우리는 매일 조금씩 다른 달을 마주할 수 있겠지. 어제 읽었던 누나의 시가 오늘 읽으면 다르게 다가오는 것처럼.

누나는 한국에 오고 싶어 했고 나는 독일에 가고 싶어 했지. 오는 것도, 가는 것도 말할 때, 쓸 때는 쉽더라. ‘싶다’라는 보조형용사에 마음을 내맡겼으니까. 정작 발길은 쉽게 떨어지지 않더라. 내일 있을 회의가, 다음주에 있을 행사가 줄지어 떠오르더라. 항공권을 예매하는 사이트에 접속할 때마다 한숨이 났어. 이렇게 많은 이들이 떠나고 돌아오는데, 우리의 발을 묶어버린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왜 기다리는 마음은 가닿는 발걸음이 되지 못했을까. 누나와 주고받은 e메일을 읽으며 나는 뒤늦게 발을 동동 구르고 있어.

지난 1년 사이, 나는 세 번의 큰 이별을 겪었어. 이별을 할 때마다 멀어지는 건 떠난 사람이 아니라 나 같았어. 내가 점점 쪼그라지는 것 같았어. 소실점이 되어 세상 모르게 사라질 것 같았지. 땅을 보고 걷는 버릇이 있었는데, 요즘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이 부쩍 늘어났어. 이별한 이들이 하늘 어딘가에 있다고 굳게 믿었던 것 같아. 나란히 걷던 날, 땅을 보며 걷는 내게 누나가 그랬잖아. “주눅 들지 마. 시 앞에서만 겸손해지고.” 잔뜩 웅크린 어깨를 서서히 펴기 시작해.

사람들이 물어. 이제 좀 괜찮으냐고. 덧붙이는 말들은 이런 것이야. 강해져야 한다고,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한다고. 그때마다 나는 희미하게 웃어.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는 것처럼. 누나의 희미한 웃음이 보이기 시작해. 나도 모르게 손을 쥐게 돼. 놓치면 안 되는 것을 갖게 된 것처럼, 어떻게든 품고 있어야 하는 감정처럼. 남겨진 사람들은 그리워할 수밖에 없으니까. ‘남겨진’이라고 썼다가 ‘남은’이라고 고쳐 썼어. ‘그리워할 수밖에 없으니까’라고 썼다가 ‘그리워할 수 있으니까’로 고쳐 썼어. 고쳐 쓰는 일이 잦아졌어. 어떤 감정을 슬픔이나 안타까움 등 한 단어로 묶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절절히 깨닫는 시간이었어.

슬픔에 깊숙이 잠겨 있으면서도 우리는 웃을 수 있잖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도리질을 하면서도 때가 되면 밥을 먹고 창문을 열어 바깥공기에 몸을 내주잖아. 그리고 천천히 떠올리기 시작하지. 함께했던 시간을, 내가 몸담고 있는 여기의 시간과 상대가 묵고 있을 거기의 시간을. 기억할 수 있어서, 기억할 것이 남아 있어서 실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누나가 노트에 적은 문구가 누나의 유고집 제목이 되었다고 들었어. <가기 전에 쓰는 시들>이었다가 누나는 글자 ‘시’ 위에 빗금을 그었지. 그리고 그 아래 ‘글’이라고 고쳐 적었어. 가기 전까지 고쳐 적는 마음, 정확함을 향해 한없이 뾰족해지는 마음에 대해 생각했어. 써야 할 시들을 가늠하고 단어를 고르고 그것들을 연결해 문장을 만드는 모습을 찬찬히 그려봤어. 독일의 시간, 뮌스터의 시간, 누나의 책상 위에서 흐르면서 고이던 시간을.

유고집인 <가기 전에 쓰는 글들>이 누나가 떠난 날인 개천절에 출간된다고 해. 2011년 5월17일에 누나는 이렇게 썼지. “오늘도 아프지 않고 글을 쓰게 해주어서 감사합니다. 내일도 그렇게 되게 해주세요.” 발병도 하기 전 죽음을 예감한 이 문장을 읽고 얼마나 가슴 아팠는지 몰라. 나는 저 문장을 바꿔 누나에게 답장을 해. “오늘도 기억할 수 있게 해주어서 감사합니다. 내일도 그렇게 되게 해주세요.”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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