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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몰랐는데, SNS에 정권 비판하는 글 자주 쓴다며? 아무래도 나가 줘야겠어. 당신 때문에 우리 연구소가 연구재단 지원 사업에서 불이익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사람이 있어. 그런 전례도 있고.” 이게 내가 받은 해고 통보였다. 이 말을 한 분은 내가 인격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존경하는 분이었고, 현실에 대한 인식 면에서도 나와 큰 차이가 없었다. 그분은 단지 나로 인해 연구소의 다른 연구자들이 불이익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누군가에게 전달받았고, 그 우려에 따라 아마도 내키지 않았을 결정을 한 뒤 어렵사리 통보했을 뿐이다.

나는 이 통보에 어떤 항변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얼마든지 다른 핑계를 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솔직하고 분명하게 상황을 전달해 준 데에 마음으로 감사했다. 이성적인 것이든 감성적인 것이든, 우려는 애당초 항의나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도대체 누가 자신 있게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불이익을 당할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말라”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불이익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갖게 만든 죄’를 인정하고 순순히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정권을 비판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전례’가 되었다. 이 과정에 정부기관은 전혀 개입하지 않았음에도, 관련자 모두는 정권이 바라는 바를 짐작하고 그에 맞춰 자율적으로 움직였다.

인신을 직접 통제하는 저질 생체권력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닌 한, ‘블랙리스트’는 외부에 공개되는 순간 효력이 반감되는 문서다. ‘확증’은 사람들을 분노하고 반발하게 만든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율적으로 순종하게 만드는 것은 확실치 않은 것들에 대한 우려다. 청와대 정무수석실에서 작성했다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는 공개되자마자 비난을 넘어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심지어 ‘내 이름이 빠진 게 부끄럽다’는 사람까지 나올 정도다. 물론 소규모 문화예술 행사를 기획하여 정부 지원을 요청할 정도의 지위에 있는 하찮은 지도급 인사들은 조금 곤혹스러울 것이다. 이제껏 하던 대로 블랙리스트에 오른 사람들을 배제하자니 부도덕한 정권의 주구라는 비난을 받을까 우려될 것이고, 그렇다고 새삼스레 끼워 넣었다간 기회주의자라는 조롱을 들을까 우려될 터이니.

1791년 영국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은 감시의 효율성을 극대화한 감옥을 구상하고 ‘패놉티콘’(panopticon)이라고 이름 붙였다. 중앙의 망루를 에워싸는 건물을 짓고 모든 창을 망루를 향해 내면 한 명의 감시자가 모든 수감자를 감시할 수 있을뿐더러, 감방 안에만 불을 밝히고 망루를 어둡게 하면 수감자는 감시자가 망루에 있든 없든, 있다고 가정하고 행동한다. 그들의 행동을 지배하는 것은 감시당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라 감시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다. 이렇듯 보이지 않음으로써 더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감시 체계는 현대 사회의 핵심 운영 원리가 되어 있다.

박근혜 정권의 다른 능력은 보잘것없었으나, 패놉티콘의 원리를 응용하는 능력만은 탁월했다. 이 정권은 불 꺼진 망루 안에서 온갖 추잡한 짓을 자행하면서도 자신을 향한 비판의 시선과 발언은 철저히 봉쇄할 수 있었다. 망루 안에 불이 켜질 때까지 감시해야 할 사람들이 외면했고 비판해야 할 사람들이 침묵했다. 그런데 이런 효율화가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대통령 앞에서 당당하게 소신을 밝히던 검사들은, 사소한 일에도 “이게 다 노무현 탓이다”라던 대중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이런 변화가 정치체제나 권력구조에서 기인한 것일까?

나는 입시부정을 저지르고 학생 과제물을 대신 써준 교수들이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그랬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들은 아마도 자기 학교의 이익을 위해, 부도덕한 짓인 줄 알면서도 내키지 않는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다른 대학 교수들이었다면 같은 조건에서 다른 결정을 내렸을까? 개인적으로는 결코 부도덕하지 않은 사람들이, 정권의 부도덕한 지시에 협조할 뿐 아니라 심지어 구체적인 지시가 없어도 눈치껏 ‘알아서’ 처리한다. 자기 양심을 배신하고 부도덕한 권력의 자발적 하수인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현상은 문화예술계나 언론계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우리 사회가 직면한 진짜 위기는, 부도덕한 권위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지식사회의 전반적 타락이다. 한줌도 안 되는 알량한 지원금에 지식사회가 이 지경으로까지 타락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야말로 우리가 진정 두려워해야 할 점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가장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문제는 이 타락의 치유방안을 찾는 일이 아닐까?

전우용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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