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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란 무엇인가? 대학 신입생 때 정치학개론 문제였다. 데모하느라고 결석을 밥 먹듯이 해 수업내용 대신 상식에 기대어 “만백성을 잘 먹고 잘살게 하는 것”이라고 썼다가 낙제점을 받았다. 이후 정치학 박사가 되고 30년 정치학을 가르치면서 같은 질문을 받으면 나는 “갈등조정의 제도화”라고 답한다. 다양한 사회적 갈등들을 국회와 같은 제도의 틀 내에서 조정하는 일이 바로 정치라는 이야기이다. 촛불혁명을 바라보면서 이 정의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의 최고경쟁력은 민주화운동, 사회운동이다. 외국 학자들을 만나면 하나같이 골리앗 투쟁, 촛불, 희망버스 등 우리의 운동을 너무 부러워한다. 그러면 나는 “이 운동들이 자랑거리가 아닐 날이 오기를 바란다”고 답한다. 그렇다. 치열한 거리 투쟁과 거리의 정치가 일상화된 것은 정치가 제도 내에서의 갈등조정이라는 제 기능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정치의 실패’, ‘정치의 직무유기’ 결과가 바로 ‘거리의 정치’이고 광장이다. 정치가 원래 해야 하는 제 기능을 제대로 수행해 우리의 자랑거리인 거리의 정치가 사라지는 날은 언제나 오려는가?

이번 촛불혁명의 밑바닥에는 민의와 동떨어진 정치, 나아가 ‘헬조선’에 대한 분노가 깔려있다. 단순한 박근혜 퇴진을 넘어 ‘11월 촛불혁명’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필요조건은 제 기능을 못하고 있는 정치의 발본적인 개혁이다. 이와 관련해 일부는 제왕적 대통령제 폐기 등 개헌을 주장하고 있다. 그보다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민심을 제대로 대표하지 못하고 있는 비민주적인 선거제도를 개혁하는 것이다. 다행히 광장의 힘, 그리고 새누리당의 분당으로 생겨난 1여4야의 5당체제는 이를 이룰 수 있는 사실상 유일무이의 기회이다. 공직선거법을 고쳐 이번 대선부터 결선투표제를 도입해야 한다. 현 제도는 30%대 지지율의 ‘소수파 대통령’을 양산해 왔다. 이는 대표성과 정통성에서 문제가 많다. 이제 결선투표제를 통해 과반수의 지지를 받는 ‘다수파 대통령’이 나라를 이끌어야 한다. 여론조사에서 우위를 보이는 야권 대권주자의 경우 이에 부정적 내지 소극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국민 과반수의 지지를 얻을 자신이 없다면 그는 대통령 자격이 없다.

민의, 즉 득표율에 비례해서 의석수를 배분하는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해야 한다. 그래야 거대보수지역정당들의 담합체제를 깨고 다양한 사회세력들이 제도정치로 나아가 거리가 아닌 제도 내에서 갈등들을 조정할 수 있다. 그것이 정치의 실패를 극복하는 첩경이다. 헌법재판소는 인구차이에 의해 표의 가치 차이가 3배 이상 나는 것은 위헌이라고 판정했다. 그러나 거대 정당들에 던지는 표는 군소진보정당에 투표하는 표의 4배로 계산되고 있다. 이를 교정하기 위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비례대표의 확대와 연동제 도입을 제안했지만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은 야합해 작년 총선에서 오히려 비례대표를 축소했다. 일각에서는 중대선거제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이 보여주었듯이 이는 돈이 많이 들고 정치신인의 진입을 막는 등 문제가 너무 많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유일하게 19세인 투표권 나이도 글로벌 스탠더드인 18세로 낮춰야 한다. 이번 촛불의 중심세력 중 하나는 중·고등학생들이고 이들은 자유발언 등을 통해 놀라운 정치의식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새누리당에서 분당한 바른정당이 이에 반대하는 것은 새 당이 여전히 수구정당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의 경고대로 이에 반대하는 정당은 촛불민심 역행 정당이다. 그러나 기이한 것은 우 원내대표가 막상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고 투표권 연령 인하와 함께 참여연대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주장하고 있는 결선투표제와 독일식 연동제에는 침묵한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한다. 결선투표제와 독일식 연동제에 반대하는 정당 역시 촛불민심 역행 정당임을.

“멍청하긴, 문제는 경제야!” 잘 알려져 있듯이 1992년 미국 대선에서 40대 무명의 아칸소 주지사 빌 클린턴이 들고나와 이라크 전쟁 승리로 기고만장하던 조지 부시 대통령을 패배시킨 유명한 구호이다. 그러나 이는 반쪽의 진실만을 담은 반쪽짜리 구호이다. 정답은 “멍청하긴, 문제는 정치야!”이다. 문제가 경제라고 하더라도 바른 경제정책을 선택해 펼 수 있는 올바른 정치가 없다면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결국 문제는 정치다. 박근혜 게이트도 다 정치가 잘못됐기 때문이며, 정치개혁, 선거개혁 없이는 박근혜 청산, 헬조선 청산도 없다.

손호철 | 서강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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