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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증세 없는 복지’ 논란은 고용과 노동소득이 증가하기 어려운 침체 중에는 법인세 인하가 경기부양에 도움이 되지 않음에도 오히려 나라살림을 개선시킨다며 혹세무민한 지식인과 정치인의 곡학아세와 무능력에서 비롯한다. 게다가 가계와 기업소득의 불균등 성장이 구조화된 지 오래됐고, 법인세 최저세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17.1%보다 7% 이상이나 낮은 상황임에도 이들은 기업의 세 부담 정상화를 기업의 해외 탈출로 등식화시키며 국민을 겁박한다. 단언컨대 현 세제구조에서는 기업의 세 부담을 원상회복시키는 이유만으로 해외로 탈출할 기업은 없다.

기업의 세 부담 증가를 전제하지 않는 증세가 불가능해보이자 이번에는 복지 과잉론으로 선회하며 이념전쟁으로 돌파구를 찾고 있다. 복지 과잉으로 국민이 나태해질 것을 우려하는 여당 대표의 모습에서 “국민의식이 떨어지기 때문에 민주주의 제도가 아직은 이르다”며 전두환 쿠데타를 정당화했던 당시 공화당 유력 정치인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이들의 의식은 “조선인은 스스로 결정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일본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던 일본 제국주의 논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새누리당 국회 원내대표실에서 6일 열린 건강보험료 개편 당·정 회의에서 유승민 원내대표(왼쪽)와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오른쪽 세번째) 등 당·정 관계자들이 비공개 회의에 앞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국가와 국민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진보 진영의 지식인 및 정치인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부자에 대한 중과세와 서민에 대한 소득지원만으로 나라살림의 안정과 복지 확대가 불충분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지언정 이들이 제시하는 동반성장, 소득주도성장 및 양극화 해소, 가계부채 해결 등은 공허한 구호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탈공업화에서 비롯한 ‘일자리 양극화’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실현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 식민지 상처 중 의식의 열등감이 가장 오래 지속된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시켜준다.

좋은 일자리가 충분히 만들어지지 않다보니 줄어든 중간소득 일자리가 저임금 서비스 일자리로 대체되는 상황에서 양극화 해소, 가계부채 해결, 복지 강화 모두 지속 가능하지 않다. 일자리 양극화의 최대 피해자는 청년세대다. 힘들게 대학에 가니 취업하기가 대학 가기보다 더 어렵고, 미래가 없다 보니 연애와 결혼, 심지어 목숨까지 포기하고 있다. 기성세대는 자신들이 만든 시스템이 더 이상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시스템을 혁명적으로 바꾸지 않는 한 한국 사회의 침몰은 시간문제다. 그런데도 한쪽에서는 소수가 독점하는 성장 타령만, 다른 한쪽에서는 지속가능하지 않은 복지 강화 타령만 하고 있다.

‘제조업의 농업화’에 대한 대안을 서비스업에서 출구를 찾는 지식인들의 주장 역시 환상에 가깝다. 서비스업으로 좋은 일자리를 충분히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은 서비스업이 가장 발달한 미국에서조차 사실이 아니다. 미국조차 일인당 평균 부가가치는 제조업이 서비스업보다 높다.

그런데 실업률이 거의 완전고용 수준까지 회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제조업은 금융위기 직전과 비교해 156만명이나 감소하였다. 반면 회복된 고용의 대부분은 질 낮은 서비스 직종의 일자리였다. 무엇보다 서비스업 대안론은 기본적으로 1960~2012년 GDP 대비 4%에서 8% 그리고 5%에서 18%로 성장한 미국의 금융 및 의료서비스의 경험에 기초한다.

문제는 두 부문의 성장이 지난해만 하더라도 자신의 이익 추구를 위해 각각 3억7000만달러의 로비 자금으로 만들어낸, 정부의 대규모 개입에 의한 것이었음을 외면한다는 점이다. 그 결과 미국의 의료 지출이 영국(9%), 스웨덴(10%), 캐나다(11%), 독일(11%)의 거의 두 배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인의 기대수명은 포르투갈과 그리스보다 낮을 정도로 의료산업의 성장이 미국민의 의료혜택과 비례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또한 이들은 금융부문의 고용 규모가 약 3.5%를 넘을 경우 금융이 오히려 성장에 해악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금융의 과도한 성장이 생산성 성장에 해악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금융허브’ 주장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에서 지난 15년간 약 500만명이 감소한 제조업의 일자리를 서비스업의 좋은 일자리로 채우지 못한 결과가 중간층 실질 가계소득을 약 5000달러나 후퇴시킨 미국 중산층의 몰락이다.

청년들이 꿈을 가질 수 있게 해주지 못하는 한 백약이 무효가 될 것이다. 산업체계의 전면 재검토와 더불어 시스템의 혁명적 재설계 없이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한 이념 및 계급전쟁, 엘리트들의 곡학아세와 지식인들의 매명(賣名)은 계속될 것이고, 이 땅의 청년들과 서민들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최배근 | 건국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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