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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가 비무장지대에서 김정은을 만났다. 엄청난 일이다. 그러나 당장 엄청난 변화가 생기지는 않을 것 같다. 현실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당대표이던 시절 한반도 신경제지도를 만들고 발표하는 과정에 아주 약간의 손을 보탰던 적이 있다. 그런 인연 때문인지, 북한 경제는 잘 모르지만 에너지나 자원 혹은 환경 분야에서는 가끔 자문을 해주게 된다. 천천히 하라고 한다. 불투명한 상황에서 너무 빠르게 갔다가는 돌아 나오기 어려운 위험에 부딪히게 된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9년 7월 1일 (출처:경향신문DB)

조림 협력 분야에 대해 주워들은 얘기는 남북협력이 현실에서 얼마나 어려운지, 진짜 뼈저리게 보여준다. 헐벗은 북한의 산에 나무를 심는 연구사업은 위험하지도 않고, 공감대를 얻기도 쉽다. 어린 묘목을 보내려고 했더니, 묘목은 괜찮은데 트럭이 제재 대상이라는 거다. 어쩌라고! 이걸 어떻게 어떻게 넘어간다 해도 다음 단계는 더 어마어마하다. 어린 묘목을 심어놓고 측정 장비로 데이터를 모으는데, 측정의 핵심 요소인 센서는 군사장비 항목이라서 절대로 안된단다. 나무 좀 심고 북한 기후나 토양에 적합한지 살펴보는 간단한 연구사업도 엄청난 기획력과 추진력이 필요한가 보다. 

독일 경제가 최근 외형적으로는 괜찮다. 국가 브랜드지수가 드디어 미국을 넘었고, 실업률은 5% 정도 되는데, 이 정도면 사실상 완전고용이라는 것 같다. 통독 이후에 가장 고용상황이 낫단다. 물론 독일 경제도 위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몇 년 전 최저임금제를 연방 차원에서 도입했는데, 동독 지역의 노동자들이 서독 지역에 대거 오면서 시장 교란이 생겼기 때문이다. 통독 30년 정도 되었는데, 이제야 그 충격이 어느 정도 가신 것 같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아직 초보적인 경제협력도 시작하지 못한 상태다. 분명히 돈이 될 것 같거나, 공적인 이익이 충분한 인프라 구축도 아직 제대로 진행하기 어렵다. 시범사업 단계도 못 넘어갔는데, 상업적으로 불투명하거나 제도가 보장되지 않은 분야는 모색 단계를 넘기 어렵다. 

공장을 짓거나 철도를 놓는 것 같은 일들은 돈이 많이 든다. 그래서 늦게 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화 특히 영상 분야는 상업적이기는 한데, 공장에 비하면 정말 규모가 작은 사업들이다. 드라마나 영화가 대중적이기는 하지만, 전체 다 해야 몇조원 시장에 불과하다. 영화나 드라마는 돈이 커봐야 100억원에서 200억원 사이다. 

KBS 같은 공영방송국에서도 남북합작 드라마 같은 걸 준비한다. 간단하게 북한의 드라마 촬영장 정도 빌리는 것인데, 그나마도 쉽지 않단다. 영화도 여러 팀이 다양한 방식으로 남북합작 영화 준비를 하는데, 경험도 없고 루트도 만만치 않으니 힘들어하는 것 같다. 사극 같은 경우는 남북이 모두 좋아할 영웅들이 있으니까 정치적으로 민감하지 않게 다룰 소재들을 발굴할 수 있다. 남북 사이에는 경제보다 문화가 먼저 움직이는 게 더 부드럽고 효과적일 것 같다.

이 분야의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공공부문이 먼저 움직일 수 없을까? 영화나 드라마 같은 소프트 경제에서 남북 사이에 오고 갈 대금을 재단 차원에서 운용하면 경제 제재를 피해 나가면서도 필요한 투자를 자체적으로 하는 메커니즘을 설계할 수 있다. 개별 회사는 북한을 상대로 리스크 헤징이 어렵지만, 영화와 드라마 혹은 뮤지컬 같은 것을 묶으면 규모에 의해서 어느 정도는 평균 수익률을 맞출 수 있다. 예를 들어 북한에 드라마 상영으로 받을 돈을 한국에서 북한 공연을 하는 것과 연계하면 돈이 오고 가지 않더라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북한 배우가 받을 돈과 남한의 설비를 각각 현물계상으로 처리하면 좀 더 복잡한 거래도 가능할 수 있다. 우리 정도 규모의 경제에서 영화나 드라마에 투자할 돈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계측하기 어려운 리스크를 안고 투자 결정을 하기가 쉽지는 않다. 

공장, 철도, 도로, 파이프라인 이런 설비만 중심으로 생각하면 남북 경제교류는 아직은 먼 얘기다. 그러나 영화나 드라마 같은 소프트 경제로 넘어오면, 남북영상협력재단 정도의 돈과 권한을 갖춘 기구 하나만 있어도 훨씬 빠르게 남북이 같은 걸 보고 즐길 수 있다. 이런 기구 하나 더 만드는 게 남북교류라는 큰 이익에 비하면 엄청나게 어려운 일인 것도 아니다. 남북협력기금이 14조원 넘게 조성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돈 좀 쓰자. 통일부가 주관하고 문체부가 협조하면 상업 영화나 드라마의 성공 가능성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다. 북한의 것은 북한에, 남한의 것은 남한에 그런 원칙을 세우면 ‘퍼주기’라고 욕할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다. 

남북합작 드라마, 남북합작 영화, 지금이 딱 시작할 때다.

<우석훈 경제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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