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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창원 | 경찰대 교수·범죄심리학


 

우리는 늘 “112는 국민과 3분 거리에 있기 때문에 믿고 안심하라”는 이야기를 들어왔다. 대통령부터 총리, 장관과 경찰청장 등 내로라하는 고위인사들은 입만 열면 “대한민국은 누구나 밤거리를 마음놓고 활보할 수 있는 안전한 나라”라고 강조해왔다. 


그 말만 믿고 일요일에도 공장에 나가 일한 뒤 밤길에 홀로 귀가하던 20대 여성이 참혹한 죽음을 맞았다. 폐쇄회로(CC)TV가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그저 무심하게 녹화만 할 뿐, 누구에게 알리지도, 경보를 울리지도 않았다. 골목길에서 터져나온 여인의 비명소리를 들은 이웃이 있었지만, 그도 그저 ‘부부 간 다툼이겠거니, 남의 집안일에 끼어들지 말자’며 외면했다.


 그래도 여인에게 희망은 있었다. 휴대전화, 112 버튼만 누르면 경찰이 3분 안에 와 줄 것이기 때문이다. 드디어 범인이 여인을 홀로 두고 방을 나갔다. ‘3분’만 막아내면 된다는 생각 하나로 용기를 내 방문을 잠그고 휴대전화로 112 신고를 했다. 마음은 급한데 수화기 너머 경찰관은 “어떤 관계냐, 왜 그러느냐”는 질문만 계속 던졌다. 초조한 마음에 “급하다, 성폭행 당한다, 빨리 와라” 간청하자 주소를 대라는 요구가 이어진다. 그 사이 무지막지한 힘으로 문을 부순 범인은 피해자를 폭행하며, 준비해 온 테이프로 거칠게 결박한다. 여인은 비명과 함께 “살려주세요, 잘못했어요”를 반복하고, 그 소리는 7분 넘게 고스란히 경찰 112센터로 중계되고 있었다.



수원 여성 피살사건 경찰 부실 대응 (경향신문DB)



하지만, 경찰과 112만 믿으며 용기와 기지를 발휘해 신고했던 피해자는 눈뜨고 볼 수 없는 조각으로 변해 있었다. 전후 사정을 알게 된 유족과 국민은 분노했고, 그 거센 분노 앞에 경찰청장과 경기지방경찰청장은 사퇴하는 것으로 사죄의 뜻을 표했다. 이들의 사퇴는 사태의 마무리가 아닌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 돼야 한다. 잘못한 경찰관들에게 응분의 처벌을 내리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들 개인만의 문제로 치부하기엔 문제의 심각성이 너무 크다. 112 신고 대응체계 개선, 위치정보법 개정과 기술 개발, 경찰의 긴급 활동 과정에서 발생하는 손실과 불편을 면책하고 보상하는 법제의 마련 모두 시급하다. 허위신고, 주취자 난동, 고소 남발 등 적극적인 법집행을 저해하는 요인의 해결도 필요하다. 하지만 경찰 조직과 운영상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파악하고 개선하는 근본적인 개혁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경찰이 가정폭력, 성폭력 등 한 개인의 자유와 인권이 짓밟히는 범죄는 집안일로 치부하며 소홀히 여기고, 국제행사나 권력자 관심거리엔 최선을 다하는 것 아니냐는 국민의 질타를 새겨들어야 한다. 관내 범죄 발생률과 검거율, 실적에 목매 주민 신고와 사건 자체를 기피한다는 비판을 무시해선 안된다. 오직 승진에만 전념해 순찰보다 시험공부, 힘든 형사업무보다 편안한 사무직 근무를 선호하는 풍토에 위기의식을 느껴야 한다. 


세계 최고의 고학력 경찰을 자랑할 게 아니라, 사건 발생 시 체계적 훈련으로 몸에 밴 조치와 대응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현실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말로만 협력치안을 외칠 게 아니라, 용기와 책임감을 가진 시민과 함께 동네를 지킨다는 ‘열린 경찰’을 실현해야 한다. 국민이 경찰을 불신하고 미워한다며 투정할 게 아니라, 사랑하고 신뢰할 수 있는 모습을 갖추고 보여줘야 한다. 


개인주의가 팽배한 서구에서도 경찰은 직업이 아닌 ‘소명(calling)’이라고 한다.무나 해선 안되며, 일반인 수준의 성실성과 용기, 사명감으론 부족하다. 국민을 보호하며, 사회적 약자를 지켜주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며, 범죄와 불법 앞에 강하고 단호한 경찰로의 환골탈태. 새로 구성될 경찰 지휘부와 국회 그리고 정부의 최우선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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