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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임시국회가 빈손으로 끝났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민낯을 드러낸 정경유착과 재벌 세습 그리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구속으로 그 어느 때보다 개혁 입법에 대한 여망이 높았고 또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선언한 대다수 후보가 재벌 개혁과 경제민주화를 주장했기에, 2월 임시국회가 의미 있는 성과를 낼 수 있을 거라는 예상도 있었다.

특히 지난번 대선 때 여당의 공약 사항이기도 했던 상법 개정안의 일부라도 통과될 가능성이 높다고 예측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이마저 무산됐다.

상법 개정안에 대해 재계는 경영권 침해와 외국 자본에 의한 적대적 M&A의 가능성을 제기하며 반대했다. 이는 어불성설의 억지 주장이다. 상법 개정안은 재벌 총수의 황제 경영과 경영권을 이용한 사익 편취를 억제하기 위한 최소한의 수단들을 담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당인 자유한국당이 의안 상정 자체를 막아서 개정안을 무산시켰고, 야당들도 소극적 자세로 수수방관한 것은 아닌지 하는 의심을 사고 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이 국민보다는 재벌의 눈치를 더 살피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2일 오후 국회에서 본회의가 열린 가운데 정세균 국회의장이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권호욱 선임기자

상법 개정안은 감사위원회 이사의 분리 선출, 전자투표, 다중대표소송, 집중투표, 자사주 처분 등에 관한 5가지 내용을 포괄하고 있다. 이 중에서 주주총회에 물리적으로 참석하지 않아도 인터넷이나 모바일폰을 이용해 전자투표를 할 수 있도록 의무화하는 방안과 출자기업(모회사)의 주주가 피출자기업(자회사)의 경영진에게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다중대표소송의 도입은 입법화될 가능성이 높았다. 왜냐하면 전자투표 의무화나 다중대표소송의 도입이 소액주주의 참여와 권리를 강화하는 방안이기는 하나, 현재의 한국 기업 소유지배구조와 승소해도 보상이 회사에 귀속되는 배상방식으로 인해 실효성이 크게 기대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 새 대통령이 상법 개정을 개혁 입법과제로 추진할 때 자유한국당과 재계가 수용하는 마지노선으로 활용할 요량으로 이번 임시국회 통과를 막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재벌 총수의 황제경영과 사익편취를 억제하기 위해서는 감사위원회 이사의 분리 선출이 최소한으로 필요하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대부분 상장회사의 이사회는 거수기 역할만 하고 있다. 주주총회에서 단순 다수결로 이사를 선출하는 현행 방식으로는 지배주주가 원하는 대로 이사를 선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 재벌 총수들은 5% 미만의 지분으로 계열사들 돈을 이용해 다른 계열사를 지배하는 출자구조로 황제경영을 하고 있다. 따라서 경영 감독의 역할을 주로 하는 이사회의 감사위원회 위원을 선출할 때 총수일가의 영향력을 제한해 독립적 이사를 선출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 감사위원회 이사의 분리 선출의 기본 아이디어다.

재벌 총수의 황제경영과 사익편취를 방지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은 2012년에 회사법에 지배주주의 통제하에 있는 지분을 제외한 주주들의 다수결로 의결해야 하는 사항들을 정한 MoM(Majority of Minority Rule) 규칙을 도입한 바 있다. 먼저 지배주주의 통제하에 있는 의결권이 전체의 33%에 못 미치는 상장회사에 대해서는 이사의 3분의 1 이상을 MoM 규칙으로 선출해야 한다. 나아가 지배주주와 친인척의 임원 임명과 보수도 주주총회에서 MoM 규칙으로 승인받아야 한다. 이스라엘의 경우, 독립적 사외이사 선출을 지배주주의 사익 추구 가능성이 높은 상장회사로 제한하는 대신에 총수일가의 경영 참여와 보수는 다른 주주의 동의를 받도록 한 것이다. 향후 상법 개정에 대한 재논의에서 우리가 참고할 만한 내용이다.

자사주 처분 관련 조항은 우리 상법이 기업의 돈으로 사들인 자사주를 총수일가의 자산처럼 사용하게 허용한 대표적인 독소조항이다. 자사주 문제는 지주회사 제도의 개선과 같은 소유지배구조의 개혁과 연계해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지주회사 체제로의 전환을 유도하기 위해 당근으로 주어진 자사주의 마법을 한시적으로 허용하는 대신에, 지주회사 체제를 기업집단 단위로 지정하고 재벌의 사업 분야에 대한 제한을 통해 경제력 집중을 억제하는 방안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재벌의 과도한 경제력 집중을 해소할 수 있는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개혁이 함께 이뤄지지 않는다면 상법 개정을 통한 기업 거버넌스 개혁의 효과는 제약적일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이 회사법 개정과 더불어 2013년에 경제력집중법이라는 특별법을 입법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따라서 재벌의 소유지배구조 개혁 방안을 구체적으로 담고 있는지가 대선 후보자들의 재벌개혁에 대한 진정성 유무를 보여주는 잣대가 될 것이다.

박상인 |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시장과 정부 연구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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