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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아미티지 보고서’의 일부다. “2012년 6월 미·일·한 합동해상훈련 참가는 분열적인 역사문제를 제쳐두고, 현재의 더 큰 위협에 대처하는 올바른 방향으로의 한 걸음을 의미한다. 덧붙여 한·일 간 체계적 대북정보 공유를 위한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과 군수물자 공유를 촉진할 상호군수지원협정(ACSA) 등 계류 중인 방위협정 체결을 위한 신속한 움직임이야말로 3동맹국의 안보이익을 위해 유익한 실질적이고 실무적인 움직임이다.”

‘아미티지 보고서’란 미국 민주·공화 양당의 전략통들이 모여 만든 초당적 대일·대아시아 전략보고서다. 2000년, 2007년, 2012년 세 번에 걸쳐 발표되었다. 정권을 넘어선 미국의 대일·대아시아 전략의 청사진 같은 것이다. 보고서 참여자들은 조야를 넘나들며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예컨대 제2차 ‘아미티지 보고서’에 이름을 올린 커트 캠벨은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를 지냈다.

미국의 전략통들은 진즉부터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피로감을 나타내며, 신속한 ‘해결’을 한·일 양측에 압박해 왔다. 그리고 지소미아와 군수지원협정의 조속한 체결을 종용해 왔다. 하지만 2012년 성사 직전 엎어졌다. 4년을 기다려 임계점까지 왔다. 한편으로 미 대선의 행방이 문제였고, 다른 한편 내년 한국 대선이 문제다. 힐러리 클린턴이 집권에 실패할 경우, ‘재균형(rebalancing)’은 실종이 우려되었고, 한국에서 대선 레이스가 시작되면 지소미아는 물 건너간다. 물론 지금의 탄핵 국면은 상상조차 하기 전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가서명 후 본서명까지의 절차를 9일 만에 해치웠다. 그만큼 미국이 강한 드라이브를 걸었다는 말이다.

서울지역 대학생들이 21일 정부서울청사 창성동 별관 앞에서 정부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체결 중지를 촉구하는 24시간 농성을 벌이고 있다. 김창길 기자

위안부 합의와 지소미아는 동일한 과정의 서로 다른 국면일 뿐이다. 그것은 오바마 대표상품인 ‘아시아로의 회귀’, 전략적 재균형의 핵심 구성요소다. 남한의 강점인 대북 인적 정보, 즉 휴민트(HUMINT)와, 일본의 강점인 신호정보(SIGINT)를 정보자산화해서 중국 견제·대북 억지라는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활용하기 위해서다. 지소미아 다음은 무언가? 당연히 군수지원협정이다. 지금은 국방부가 눈치보고 있지만 때가 되면 언제든 들고나올 거다.

2014년 한·미·일은 ‘군사정보공유약정’을 체결했다. 미국을 매개로 3국은 군사정보를 이미 공유하고 있다. 우리도 미국과 이미 엄청난 신호정보를 공유하고 있는데 한·일 지소미아가 왜 또 필요할까?

이는 미국이 또 다른 무엇을 기획하고 있다는 말이다. 한·일 군사협력을 정보·군수 그 다음 병력으로까지 확장시켜 궁극적으로 한·일 상호방위조약으로 가는 것 말이다. 그래서 나는 한·일 지소미아를 한·일 군사동맹, 나아가 한·미·일 군사동맹 혹은 아시아판 나토의 ‘전’ 혹은 ‘전전’ 단계로 가는 신호탄으로 본다.

사드(THAAD)와 더불어 지소미아는 북·중·러 북방삼각과 끝없는 군사적 긴장과 대결, 남북의 무한대결이라는 재앙을 불러온다. 박근혜가 자초한 ‘외환(外患)의 우(愚)’로 인해 우리는 미국 군사전략의 영원한 ‘졸’로 전락, 국가전략의 중장기 전망은 고사하고 그저 내일의 일을 걱정해야 할 저주받은 민족이 될 것이다. 미군의 지휘하에 한·일 동맹군이 북한군과 전쟁을 하는 장면이 소설에 불과할까?

그러면 이제 무엇을 해야 하나.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 국내적으로는 국회에 제출된 한·일 지소미아 효력정지를 위한 특별법이나 헌재 권한쟁의 심판 등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효력이 대한민국 영역에만 한정돼 한·일 지소미아의 국제법적 효력을 무력화하진 못한다. 그래서 두 번째 경로가 있어야 한다. 한·일 지소미아 제21조에는 조약의 ‘종료’가 규정되어 있다. 협정은 1년 동안 유효한데, 만기 90일 전에 서면통보가 없으면 자동갱신된다.

그렇다. 이 말은 만기 90일 전에 협정의 종료를 팩스 등을 통해 서면통보하면 협정은 종료, 즉 폐기된다는 뜻이다. 당장은 첫 번째 경로를 추진하되, 두 번째 경로를 통한 협정의 폐기가 우리의 선택이다. 한·일 지소미아는 사실 미국이 요구한 것이다. 쉽지 않다. 성공하자면 정권교체로 탄생한 새로운 정치적 리더십의 첫 번째 과제로 위안부 합의와 지소미아 폐기를 올려놓아야 한다. 여기에 또 하나, 트럼프는 이른바 오바마 ‘업적’의 두 축 중 하나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를 선언했다. 나머지 하나인 재균형을 대략 1년에 걸쳐 재검토할 것이다. 그래서 두 번째 경로, 즉 폐기 프로세스를 작동시키되, 트럼프의 아시아 전략에 개입하기 위한 협상을 해야 한다. 할 일이 많다. 단, 박근혜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

이해영 |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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