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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민│변호사(민주주의를 위한 변호사모임)


루마니아의 작가 C V 게오르규가 1949년 발표한 소설 <25시>의 주인공 모리스는 자신의 아내를 탐내던 헌병 장교의 모함에 빠져 루마니아인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수용소에 갇히게 된다. 이후 그는 수많은 수용소를 전전하면서 한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빼앗기게 된다. 그는 한 수용소에서 만난 신부에게 이렇게 하소연한다.


“내가 왜 붙잡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받은 것과 같은 고통을 받았어야 하는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나는 한 사람의 인간입니다. 내가 나쁜 일을 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나를 가둘 수 없고, 괴롭힐 권리가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나는 일할 수 있는 것, 처자식과 함께 비와 이슬을 가리고, 먹기에 족할 만큼의 음식을 손에 넣는 것을 원했을 뿐입니다.”

모리스의 이야기를 듣고 난 신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너에게는 죄가 없다. 오직 국가에게만 죄가 있을 뿐이다. 신이 그 국가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최근 한 민간인이 자신의 개인 블로그에 정치지도자를 풍자하는 동영상을 올렸다는 이유로,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의 사찰을 받고, 위 기관의 압력에 의해 다니던 직장에서 쫓겨나게 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의혹이 사실이라면 그는 <25시>의 주인공과 다를 바 없다. 아무런 나쁜 일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특정 정치지도자에 대한 풍자 동영상을 개인의 일기장과 같은 블로그에 올렸고, 그로 인해 특정 정치지도자 혹은 그 정치지도자에게 충성을 다하는 자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철저히 파괴된 것이다.


피의자 신분 출석… 자정 넘어 귀가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과 관련, 검찰의 조사를 받기 위해 19일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한 이인규 전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이 쏟아지는 취재진의 질문에 잠시 눈을 감고 있다. |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관련기사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7200259155&code=940301]


소설 <25시>에서 헌병 장교로 표상된 권력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서슴없이 국가의 이름으로 힘을 행사했다. 국가권력이 ‘자신이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행사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망각하고, 자신의 사욕을 채우기 위하여 움직일 때 ‘25시’는 시작된다.


인터넷논객 미네르바에 대한 구속기소, 정연주 전 KBS 사장이나 에 대한 기소 등 이명박 정부는 자신의 비판자들에 대하여 자신의 힘을 철저히 과시해왔다.

그러나 이는 뒤이은 무죄판결을 보더라도 정상적인 국가권력의 행사라기보다 정권에 대한 비판자들의 시민권을 박탈하고 다른 사람들을 겁주려는 처사였다. 그런데 여기에 더하여 이명박 정부가 국정원이나 기무사를 동원해 ‘자신의 치부를 드러낼 것’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사찰’하는 행위조차 서슴지 않았다는 의혹이 계속 제기되어왔다. 우리나라는 이미 ‘25시’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자유민주주의 사회는 전체주의 사회와 달리 정부의 무오류성을 믿지 않으며, ‘정부는 일반대중과 마찬가지로 또는 그 이상으로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권력을 가진 자가 오류를 범할 경우 그 영향은 개인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불행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 이에 따라 정부는 국민의 비판을 수렴해야만 그 오류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통치권자의 기분을 상하게 하였다는 이유만으로 비판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이명박정부를 자유민주주의 정부라 할 수 있을까?

지금이라도 국민의 비판을 들으려는 반성이 필요할 것이다. 이대로는 신이 나서지 않더라도 국민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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