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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민│변호사(민주주의를 위한 변호사모임)


민주주의는 1인 1표, 즉 각 개인의 정치적 힘을 동일하게 인정하는 것에 기반한 것이어서 가장 공평한 정치체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누구든지 국민을 설득하면 제한된 기간동안이지만 정치적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공평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공평한 체제가 유지되고 작동하려면 정치적인 의사표현의 기회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보장되어야 한다. 정치적, 경제적 힘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정치적 의사표현의 기회가 널리 보장되고, 그외 사람에게는 그렇지 못할 경우 위와 같은 정치체제는 작동할 수 없는 것이다. 특히, 경제적인 힘이 강한 사람들이 경제적인 힘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발언기회까지 보다 많이 장악하게 된다면 사실상 중세의 귀족사회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에서 정치적 표현의 기회가 공평하게 보장되고 있을까? 정치적 표현수단 중 집회를 기준으로 봤을 때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많은 정치적 표현수단 중 왜 집회를 기준으로 보느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가 ‘우리나라가 대의제를 선택하고 있는 이상 선거 이외에 정치적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라고 꼽을 정도로 그 중요성이 크고, 특히 정치적 표현수단 중 없는 사람들을 위한 수단으로 가장 널리 인정되어 오고 있는 만큼 집회에 대한 공평한 기회는 정치적 표현의 기회가 공평하게 보장되고 있는지에 대한 판단기준이 될 만하다고 본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근래에 들어 집회라는 표현수단은 점점 비싸지고 있다. 집회를 한 번 하려면 법원까지 가야하는 상황들이 벌어지고 있고, 집회 과정에서 작은 실수하나라도 발생하면 막대한 손해배상청구의 공포에 시달려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동희오토 노조의 경우 회사 측에서 고용한 10명이 넘는 용역들이 24시간 2교대로 집회신고를 하여 집회장소를 선점하고, 경찰은 ‘장소가 이미 선점되었다’는 이유로 집시법 제8조를 들어 기계적으로 금지통고를 하여 왔기에 결국 행정법원에 집회를 하기 위한 소송을 제기할 수밖에 없었다. 동희오토노조의 경우 행정소송을 제기하기 전에 노숙을 하면서까지 집회신고를 하려고도 해 봤지만 고가에 고용된 사람들과 승부하기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아래 사진은 2010.5.13. 동희오토 노조 소속 노동자들이 회사에서 고용한 용역들의 방해를 뚫고 집회신고를 하기 위하여 해당 경찰서 앞에서 노숙하고 있는 모습이다). 



위와 같은 소송제기 덕분인지, 아니면 ‘돈으로 집회를 사는 것을 비호한다’는 등 지속적으로 악화되는 여론 탓인지 담당경찰서는 지난 주 목요일 경에 일주일의 절반은 문제의 장소에서 동희오토노조가 집회를 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타협안을 내놓았다. 결과가 좋은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법원에 소송을 내기까지 동희오토노동자들이 들인 비용과 시간을 생각하면 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단순히 동희오토노조에 대해서만 발생했던 것이 아니다. 거의 모든 대기업들은 자신들의 사옥 앞에서 열리는 집회, 특히 자신들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집회에 대해서는 비슷한 방식의 방어방법을 사용하고 있어 집회 한 번 하려면 법원까지 가야하는 상황들이 속출하고 있다.

이렇게 집회가 비싸지는 것은 집회를 매개로 한 정치적 의사표현이 비싸지는 것이고 결국 민주주의의 이념과 달리 경제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보다 더 많은 정치적 힘을 부여하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민주주의도 비싸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 피해는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제일 먼저, 그리고 제일 크게 돌아가게 된다. 있는 사람들이야 다른 정치적 수단을 찾으면 되고, 꼭 집회를 하여야 한다면 사람을 사서 24시간 줄 서서 신고하게 하거나 아니면 손쉽게 법원을 찾아 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막아 최소한 집회에 대해서라도 공평한 기회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먼저 경찰이 집시법 제8조를 합리적으로 해석하여야 할 것이다. 집시법 제8조는 동일한 장소에 중복된 집회가 신고되면 바로 금지할 수 있다고 하지 않고, 중복된 집회가 목적상 서로 충돌할 우려가 클 경우에만 후행으로 신고된 집회를 금지할 수 있도록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경찰은 무조건 후행하는 집회를 금지하여 왔다. 그러다 보니 실제로 집회를 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집회가 열리는 것을 막기 위해 해당 집회장소에 대해 무조건 먼저 집회신고를 하려는 경향이 생겼고,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집회신고자들에게 달리기를 시키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연출되기도 한 것이다(아래 사진은 서울동작경찰서가 2008.11.26. 0시 정각에 경찰서 입구에서 집회신고를 받는 민원실까지 집회신고인들에게 달리기를 시키는 모습을 촬영한 것이다. 집회의 개최여부가 집회의 필요성 등에 의해 판단되지 않고, 집회 신고자의 달리기의 빠르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물론 이런 달리기 기회조차 주지 않았던 동희오토 노조 담당경찰서는 더 심했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이라도 경찰은 합리적으로 살펴 서로 충돌할 우려가 큰 집회가 아닌 이상 신고된 모든 집회를 하게 하거나 혹은 다른 진정한 집회를 막을 목적으로만 집회신고를 하는 경우를 가려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중복된 집회가 신고될 경우, 어떤 집회를 허용할 것인가 혹은 병행해서 하게 할 것인가에 대한 보다 분명한 기준이 마련되어져야 할 것이다. 현행 집시법의 다른 규정들과 마찬가지로 집시법 제8조도 추상적으로 규정되어 있어 경찰의 자의적인 판단이 가능한 상태이다. 이를 보다 분명히 해서 불필요한 오해와 다툼을 줄일 필요가 있다. 또한 다른 진정한 집회를 막기 위한 목적으로만 집회를 신고하는 경우에 대해서는 일정한 불이익을 주는 방안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제도적 개선들을 통해 진정하게 필요한 사람들에게 집회가 보장되고, 돈이나 시간을 들이지 않고도 자신의 문제에 대해 정치적 발언을 할 수 있어야 비로소 민주주의가 작동할 수 있는 기반이 갖추어지게 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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