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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에 강연을 가면 ‘용기를 얻었다’는 메모를 전하는 학생들을 만난다. 하루는 내용이 상세했다. 요약하면 이렇다. 맹목적 찬반토론에 집착하는 학교의 사회과목과 달리 ‘무엇이 틀렸다’는 비판을 확실히 해 줘 고마웠다, 교사들의 기계적 중립성이 답답했는데 좋은 사회를 위해 나쁜 선택을 하지 않는 법을 알려줘 좋았다 등. 하지만 같은 내용을 학부모 연수에서 언급하면 항의가 빗발친다. 정치적 선동 그만해라, 특정 정당 떠올리게 하는 발언 삼가라 등. 빨간 띠 두르고 혁명에 동참하라고 강요했다면 모르겠는데, 양극화를 방관하는 일상의 씨앗을 찾고 편견을 깨자는 내용을 문제 삼는다. 나도 따진다. “왜 저한테만 정치적이라고 하세요?”

본질, 순수 등의 고상한 단어로 교육을 포장하는 사람들은 기득권을 비판하는 내용에만 ‘정치적’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자본주의를 굳건한 질서로 가르치는 교과내용은 문제 삼지 않지만, 이를 비판하면 정치적인 사람이 된다. 성장은 절대 규율이지만, 분배는 정치적 선동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발전을 찬양하면 도덕적이지만, 이면을 따지면 뒤틀렸다고 욕먹는다. 기업을 칭찬하면 긍정적이지만, 노조의 필요성을 말하면 정치색깔로 얼룩졌다고 비난받는다. 석차와 대학 서열화는 세상 이치지만, 학력주의를 비판하면 포퓰리즘 소리를 듣는다. 지금껏 성차별에 둔감하고 동성애를 공공연하게 혐오했던 수많은 정치적 교사들은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았지만 성평등을 주장하고 성소수자의 인권을 부르짖었던 또 다른 정치적 학생들은 온갖 혐오에 노출되었다.

선거권이 만 18세에게 주어지니 익숙한 반론 두 가지가 떠돈다. 판단력이 부족한 미성숙한 나이라는 것과 정치화에 대한 우려다. 선거권 조정은 청소년을 미성숙하다고 보는 ‘굉장히 정치적인’ 관념에 반대해 바위에 달걀을 던졌던 정치적 행위가 오랫동안 있었기에 가능했다. 솔직히 어른들이 성숙을 거론할 처지인가. 돈봉투 오갔던 시절은 말하지 않겠다. 여전히 단어 몇 개에 현혹돼 사람을 이념으로 재단하고 재건축, 부동산 개발호재 등을 요리조리 짜깁기한 공약에 정신이 홀린 사람들 덕택에 국회의원 배지 단 분이 얼마나 많은가.

교실이 정치판이 될 것을 우려한다는 말은 지금껏 정치라는 말이 얼마나 오용됐는지를 증명한다. 만 18세가 모두 학교에 있을 거라는 ‘굉장히 미성숙한 사고’는 따지지 않겠다. 우려가 기우란 말도 핵심이 아니다. 지금까지의 교육 정치판엔 왜 그렇게 관대했는지 묻고 싶다. 승자독식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명문대에 진학해야 하니 학교에서 줄 세우는 공부만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정치적이지 않은가? 약육강식 논리로 공동체를 이해하겠다는 것도, 탐욕이란 고삐 풀린 마차를 제어하지 않겠다는 것도 다 정치적이다. 시험성적만이 보상의 척도라는 건 전지전능한 신의 계시라도 된다는 말인가?

반대 의견이 없으면 한쪽의 논리가 우주의 질서처럼 포장된다. 자기 생각이 대자연의 질서로 인식되면 차별에 둔감해진다. 사람들이 만든 사회 안에 어떤 논리도 침범할 수 없는 순수의 결정체 따위는 없다. 교실에서도 여러 정치적 이야기가 가득해져야지만 이상한 신념을 깰 수 있다. 면학 분위기가 흐트러진다고 걱정들인데, ‘그러자고’ 선거권은 청소년들에게도 필요하다.

오찬호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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