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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박사님이죠? 디스 이스 피터. 우리가 이겼습니다.” 상기된 목소리의 피터 바돌로뮤의 전화를 받은 게 2009년 봄, 11년 전 일이다. 한국인보다 한옥을 더 사랑하는 사람으로 알려진 그는 1968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에 왔고, 강릉 선교장에서 5년 가까이 머물다 한옥의 매력에 푹 빠졌다. 서울로 와서 잠시 여의도 아파트에 살았지만, 흙도 마당도 없는 답답한 곳을 떠나 1974년 동소문동 한옥으로 이사해 50년 가까이 한옥에서 살고 있다. 2004년 봄, 자신의 집을 포함해 동네가 재개발예정구역으로 지정된 걸 알고 이웃들과 함께 재개발 반대운동을 시작했고, 2008년 재개발구역 지정 취소소송을 제기하여 1년 만에 취소결정을 얻어냈다. 재개발 않고 지금의 내 집에서 오래오래 살 수 있는, 어쩌면 당연한 권리를 아주 힘겹게 얻어낸 것이다.

“교수님, 통화 가능하세요?” 지난해 12월 초, 교수단지로 불리는 정릉2동에서 단독주택 마당을 개방하는 정원축제를 7년째 이끌어오고 있는 정릉마실 김경숙 대표의 문자를 받고 바로 전화를 드렸다. “이제는 끝난 줄 알았던 재건축이 다시 살아 꿈틀거리네요. 우리 동네를 오래 지켜본 전문가로서 시장님께 의견서를 써주셨으면 해요.” 그러겠다고 답했고 며칠 전 의견서를 써드렸다.

교수단지 주민들과의 인연은 2010년 가을로 거슬러 올라간다. 졸업설계 수업 때 이곳을 대상지로 선정한 학생들과 현장수업을 하면서였다. 세계유산 정릉 입구에서 현장답사를 시작해 서울에 드물게 남은 단독주택 마을을 한 채 한 채 돌아봤다. 

주민들은 대문을 열고 마당을 보여주었고 따뜻한 차를 대접해주었다. 학생들은 주민과 소통하면서 단독주택 동네를 잘 고치고 되살리는 재생계획을 세웠고 ‘초록이 물드는 동네’라는 제목으로 서울시 마을 만들기 학생공모전에 출품하여 대상을 받았다. 시상식 날 학생들이 만든 동영상을 보면서 눈물짓던 주민들의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단독주택 동네 ‘정릉2동’이 ‘정릉6구역’이란 낯선 이름의 재건축구역이 된 것은 2008년 10월이었다. 오래된 빌라단지 주민들은 재건축을 원할지 몰라도, 단독주택을 그대로 유지하길 바라는 더 많은 주민들은 그때도 지금도 재건축을 원치 않는다. ‘정릉 사랑 주민모임’이 결성되면서 재건축 반대운동이 힘을 얻어 지금까지 재건축을 막아왔고 2020년 3월 ‘일몰제’ 적용으로 재건축구역이 해제되면 오랜 소망이 이뤄질 줄 알았는데 재건축추진위가 기한연장을 신청한다는 소식에 주민들은 다시 불안해하고 있다.

재개발이나 재건축을 ‘할 권리’ 못지않게 ‘안 할 권리’도 소중하다. 오래 살아온 내 집과 우리 동네에서 지금처럼 앞으로도 오래오래 살 권리는 왜 존중되고 보장받지 못하는 것일까? 이유가 있다. 대단위로 개발해야 사업성이 있고 수익이 커지는 자본논리 때문이다. 

두 권리를 모두 다 존중하는 방안은 없을까? 있다. 개발단위를 줄이는 것이다. 사업성과 수익은 그 안에서 해결할 몫이다. 한 프로젝트의 사업성과 수익 때문에 다수 시민의 주거권이 더는 침해받지 않아야 한다.

<정석 | 서울시립대 교수·<천천히 재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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