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정치가 국민 신뢰를 얻지 못해 마음이 아프다. 그간 민주주의 이론은 보완되고 수정되어왔지만, 현실 반영은 묘연하다. 몇 차례의 정권교체가 있었지만, 지방자치는 아직도 낮은 수준에서 시행되고 있다. 정치가 내 삶에 변화를 주고 있다는 인식은 늘었지만, 국회의원 숫자를 늘리는 일도 요원하다. 나는 정치권에서 주로 정책·선거조사를 담당했었는데, 정치가 국민을 대표해야 한다는 명제를 금과옥조처럼 여겼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였다. 내 머리엔 어떻게 하면 정치가 국민을 대표할 수 있는지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서가 없었다. 국민과 정치, 그 중간에 존재하는 넓은 공간을 어떻게 메울 것인지에 관한 문제의식조차 깊지 않았다. 엉킨 실타래를 풀다 지치면, 여론에 편승하거나 푸념하기 일쑤였다. 그래서인지 ‘국민만을 바라보고 정치를 하겠다’라는 말이 좋은 정치인의 신념처럼 들리기보다는 실타래를 꼬이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걱정부터 앞선다. 그 말이 어디 틀린 말이겠는가. 그런데 그 말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민과 정치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라면, 둘 사이엔 수많은 조절변수가 존재할 것이다. 조절변수는 국민과 정치 사이를 가깝게 하거나 멀게도 할 수 있다. 국민과 정치의 거리를 좁힐 조절변수는 무엇이 있을까. 올 한 해를 되돌아보면 ‘포용’이 아닐까 싶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한 사람은 1600년대 기독교인이었고, 또 한 사람은 2000년대 불교 신자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포용이 사회개혁에 가장 강력한 무기임을 통찰한다. 16세기 유럽은 종교개혁의 열풍이 휩쓸었다. 구교와 신교는 서로 자신에게 정통성이 있다고 싸웠고, 많은 사람이 죽었다. 존 로크는 저서 <관용에 관한 편지>를 통해 서로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자신은 정통이고 상대는 이단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소모적인 싸움이라고 주장하며, 교회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기준을 제시했는데, 포용이 그것이었다. 포용이야말로 참된 교회를 구별하는 가장 분명한 기준이라고 했다. 로크는 권력이 종교에 기초한다는 주장에 반대하며,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았던 시기에 종교를 사적 영역에 놓고자 했다. 로크는 국가의 힘은 국민의 지지에 기초한다고 보았고, 포용을 통한 개혁으로 통합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창했다. 법륜 스님 역시 <쟁점을 파하다>에서 사회적 대립이 대한민국의 위기를 초래한다고 봤다. 인도불교는 습합, 즉 서로 다른 교리나 학설을 절충하는 경향이 있다. 다른 종교에 배타적이지 않다. 타파의 성전, 교리라도 의미와 정당성을 용인하는 흐름이 있다. 불교는 토착 종교에 대해서도 관대한 편이다. 포용에서 한 걸음 나아가, 통합이 시대 과제라고 이야기한다. 국민통합이 우선되어야 남북 간 갈등을 해소하고 통일을 할 수 있으며, 동아시아 각국의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동아시아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고 언급한다.

이틀이 지나면 2020년 새해다. 정치와 국민 사이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선, 포용하고 통합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해 보인다. 적폐가 처음부터 적폐였겠는가. 당시 문화와 제도의 결과물 중 일부가 기대하지 않은 곳에 쌓이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거나 외면하다 결국, 오늘날 문제가 된 것은 아닌지.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적폐의 공범일 수 있다. 적폐는 고도성장의 미필적 고의에 의해 남겨진 문제들, 빈부격차, 세대갈등, 지역갈등, 안전불감증, 환경파괴 등을 낳았기 때문이다. 정권을 구별하지 않고 지금도 쌓이고 있다. 범죄는 처벌하면 되지만, 적폐는 다른 접근법이 필요할 수 있다. 적폐가 심각한 사회갈등으로 등장했다는 것은 사회적 합의가 깨졌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포용하고 통합하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내년에 가장 필요한 일은 정치, 언론, 사법, 노동, 의료, 교육, 복지, 환경 등의 분야에서 새로운 행동강령, 새로운 사회계약을 써 내려가는 일일 것이다.

<최정묵 | 비영리공공조사네트워크 공공의창 간사>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