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깜깜한 겨울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빨간 신호등을 보고 교차로에 서 있을 때, 큰 지진인가 싶을 만한 소리가 났다. 잠시 정신이 없었다. 조금 지나서야 차가 들이받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다음 일들, 그러니까 더 이상의 사고는 일어나지 않은 채로, 사고를 낸 운전자도 우리도 겉으로 보기에 심각한 부상은 없이, 차를 옮기고, 보험사를 부르고, 경찰을 부르고, 잘못을 인정하는 것까지 순리대로 일 처리가 되었다. 낡은 차는 며칠 지나 결국 폐차장으로 갔고.
사고가 난 곳이 집과 멀었다. 가까이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병원부터 찾았다. 엑스선 사진으로는 별 이상이 없었다. 의사는 입원을 권했지만, 꼼짝 못하겠다 싶을 만큼 아프지는 않았다. 세 아이와 집에서 몇 시간 떨어진 병원에 입원하는 것도 피하고 싶은 일이었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하루가 더 지나면서 그제서야 온몸 여기저기가 아프기 시작했다. <스스로 몸을 돌보다>를 펴낼 때, 읽은 자료에서 본 것이 떠올랐다. 사람이란 큰 충격에 부딪히거나, 갑작스러운 고통이 밀려오는 상황이 되면, 온몸에서 진통 작용을 하는 물질이 나온다고 한다. 그만한 충격이라는 것은 전쟁이나, 재난과 같은 상황이라 당장 어디가 아픈지 알아채는 것보다, 그 자리에서 도망칠 수 있도록 몸이 반응한다는 것이다. 흔히 교통사고든 무슨 사고든 하룻밤 자고 일어나야 얼마나 아픈지 안다고 하는 게, 이런 식으로 오랫동안 사람 몸에 새겨진 경험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중에 병원들을 전전하면서 들은 것은, 사고에 따라서, 사람에 따라서 진정한 고통이 밀려오는 시간은 다음날이기도 하고, 며칠 뒤이기도 하고, 또 그보다 더 오래 지나서일 수도 있다고 했다.
집에서 병원은 멀다. 동네 의원이라고 해도, 15㎞는 가야 하고, 입원을 할 수도 있겠다 싶은 마음으로 찾아가는 병원이라면 꼬박 한 시간을 쉬지 않고 운전해야 한다. 사흘 밤이 지나서는 점점 더 몸이 아팠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병원을 찾았다. 첫 번째 병원에서 그랬다. “교통사고 환자이신가요? 골절은 없으시고요? 어제나 그제 오셨으면 바로 입원 가능하셨을 텐데. 이제 기간이 지나서 입원은 안 돼요. 혹시 다른 병원 가셔서 입원하시면 하루만 있다가 오세요. 전원은 되거든요. 오시면 잘해 드릴게요.” 의사는 만나지 못했다. 길 건너 병원으로 갔다. 바로 앞 차례의 환자를 붙들고 입원치료를 권하던 의사는, 이야기를 듣더니 대뜸 말했다. “잘 알겠습니다만, 병실이 없어요.” 네 번째 병원 의사가 조금 더 이야기가 길었다. “하루이틀 사이에 왔어야지. 그러면 바로 입원된다고. 사고 나면 3~4일 지나면서부터 가장 아픈 경우가 많기는 해요. 그래도 골절 같은 거 없이 입원시켰다가는 사흘에 한 번씩 내가 왜 이 환자 입원시켰는가 사유서 내야지, 그리고 예전에 그 자동차보험, 거기서 소송 걸어서 의사 면허도 날아갔거든.”
사고가 났던 그날 밤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더 멀었다. 두 병원에서 나는 의사를 만나지 못했다. 골절은 없이, 입원치료를 바라는, 사고가 난 지 사흘 밤이 지나고서야 병원을 찾은 교통사고 환자는 의사를 만나기 어렵다. 의사를 만난 병원에서 나는 환자의 고통에 대해서 귀 기울이거나, 공감하는 의사도 만나기 어려웠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딴 병원 가서 알아보세요” 하는 이야기마저 들었다.
교통사고로 한 해 꼬박 고생한 선배가 말했다. “그러게, 내가 사고 난 거 이야기했을 때 뭘 들었어. 일단 누워야 한다니까.” 괜히 움직일 만하다고 섣불리 집으로 돌아가지는 말라는 것이, 지금 이곳의 보험과 의료 시스템이다. 스스로 나이롱환자, 보험사기가 되는 거 아닌가 싶은 생각 같은 것은 말고, 사고가 나면 일단 드러누우라는 보험과 의료체계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 나중에 어떻게 아플지는 모르니까. 그때는 아프다고 해도 환자 이야기를 듣는 곳은 없다.
<전광진 | 상추쌈 출판사 대표>
'일반 칼럼 > 시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선]여자보다 사람이 먼저다 (0) | 2018.03.12 |
---|---|
[시선]이주여성도 함께 “미투” (0) | 2018.03.05 |
[시선]당신은 어떤 8년을 만든 사람인가 (0) | 2018.02.19 |
[시선]캐나다엔 SKY가 없다 (0) | 2018.02.12 |
[시선]피고인 이재용 (0) | 2018.0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