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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정치의 요체를 묻는 질문에 민생과 국방, 신의를 꼽았다. 질문을 던진 제자 자공은 정변과 전쟁이 잦았던 춘추시대에 국제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던 인물이다. 선택과 투자를 중시하는 사업가답게 그는 이 범범해 보이는 답변을 파고들어 우선순위를 매겨달라는 주문을 하였고, 이에 대한 공자의 답변이 바로 ‘무신불립(無信不立)’이다. 안위를 위한 국방, 생존을 위한 민생도 중요하지만, 군주와 백성 사이의 신의가 무너진다면 정치를 하고 말고 할 나라 자체가 성립할 수조차 없다는 뜻이다. 눈에 보이는 민생과 국방을 넘어서 그 성립 기반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요구는, 실리에 밝은 자공에게 도전적인 일갈이었을 것이다.

신의는 어디에서 오는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군주가 백성을 버리지 않고 솔선수범해 죽음도 불사해야 백성들이 그를 믿게 된다는 것이 유가의 가르침이다. 법령의 예외 없는 시행에서 신의가 형성된다는 법가의 견해도 있다. 상앙은 나무막대 하나를 남문에서 북문으로 옮기는 이에게 상금을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법을 어긴 귀족의 코를 가차없이 베어버림으로써 신의가 완벽하게 지켜지는 사회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 결과 진나라는 초강대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국방과 민생은 지금도 국가의 존재 이유다. 그러나 안보를 위협한다는 논리로, 경제 살리기가 시급하다는 이유로, 정작 신의는 땅에 떨어져 짓밟혀도 과연 괜찮은가. 경제민주화와 증세 없는 복지 증진이라는 말을 믿고 권력을 맡긴 국민들에 대한 신의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돈을 줬다는 사람의 리스트와 증언 파일까지 있어도 권력의 실세들은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는 나라에서 무슨 신의를 말하겠는가.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창궐이 우리 사회에 던진 것은 “과연 국가의 공공성을 신뢰할 수 있는가”의 문제인데 이 역시 민생을 챙긴다는 미명으로 덮어버릴 기세다. 목숨을 건 솔선수범도, 예외 없는 법령 시행도 없다면 신의가 어디에서 오겠는가.

신의의 정치는 누구나 하는 말이다. 그러나 국가 존립의 관건으로 생각하지 않으면서 신의를 입에 올리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신의를 저버리는 일이다. 끌어줄 말의 멍에를 걸 고리가 없는 수레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물건이다. 신의가 없는 사람도 이와 같아서 정치는커녕 사람 구실조차 할 수 없다. 역시 공자의 말이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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