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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소설가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1843)에서 비정한 수전노 스크루지의 회심을 돕기 위해 등장하는 유령 중 하나는 기괴한 모습의 소년과 소녀를 데리고 다닌다. 이름이 각각 무지(Ignorance)와 궁핍(Want)인 두 아이는 인간 사회의 두 난제를 상징하는데, 유령이 특히 강조하는 것은 소년(무지)의 위험이다. “무엇보다 더 이 소년을 경계하라. 소년의 이마에 적힌 파멸(Doom)이라는 글자가 내게는 보인다.” 영국에 디킨스가 있었다면 프랑스에는 위고가 있었다. 20년쯤 후에 쓰인 <레미제라블>(1862) 3권에서 빅토르 위고는 말한다. “무지라는 굴을 파괴하면 범죄라는 두더지도 파괴된다.” 무지는 개인의 불행과 사회의 파멸을 초래하는 범죄의 원인이니 일종의 교육 안전망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두 작가의 호소였다.

이것은 19세기의 공부다. 삶의 목적은 개인의 긍정적 잠재력을 계발하여 행복을 성취하고 공동체에 기여하는 것인데, 공부를 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방치, 학대, 파괴하게 된다는 것. 이를 ‘나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한’ 공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공교육이 인간의 보편적 권리이자 의무가 되면서부터는 공부의 성격이 변했다. 이제 공부는 정신적 자기 구원이 아니라 물질적 기반 구축을 위한 것이 되었고, 출세의 사다리에서 상층부에 올라가기 위한 경쟁 수단이 됐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관용구가 보여주듯, 이런 공부는 누구에게도 무시당하지 않겠다는 집념의 한 표현이다. 이를 ‘타인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한’ 공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아이들에게 이런 공부를 시킨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의 공부는 또 달라졌다. 그동안 우리가 놓친 것들에 대한 공부. 나를 구원하고 너를 이기는 공부를 하는 동안 내 안에 뿌리내린 맹목과 편향에 대한 자기 교정으로서의 공부. 그 맹목과 편향으로 발생한 역사적 폭력의 재발을 저지하기 위한 집단적 노력으로서의 공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폭력의 주체가 될까 두려워하며 자기를 성찰하는 공부. 그러니까 ‘나로부터 타인을 지키기 위한’ 공부 말이다. 이런 공부는 대선을 앞둔 정치인들에게도 중요할 것이다. 한 예비후보는 공부를 이유로 출마선언을 미루기도 했고, 다른 예비후보는 출마선언 자리에서 이후의 공부를 약속한 바가 있다. 공부를 하겠다는 각오는 반갑다. 그러나 문제는 ‘얼마나’가 아니라 ‘어떤’ 공부를 하느냐다.

무지는 조롱의 대상이 아니지만
무지가 무시의 결과라면 다르다
무시로서 무지는 폭력이기 때문
정치인들의 공부 각오 반갑지만
얼마나보다 어떤 공부냐가 중요

윤석열 예비후보가 “필요하다면 1주일에 120시간씩 2주를 바짝 일하고 그다음에 쉬는” 것을 이야기했을 때 이것이 특별히 절망적이었던 것은, 이런 가치관이 발설되는 동안, 지난 150년 동안 수많은 학자와 활동가들이 축적해 놓은 노동인권 담론이 그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안타깝기로는 최재형 예비후보도 마찬가지다. 가족모임에서 국민의례를 행하는 것이 본인에게는 뿌듯한 자랑인데 왜 사람들은 그토록 불편해하는지, 그 낙차가 당사자에게는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우선돼야 할 것이 개인의 존엄이자 자기 결정권이라는 근대적 인권 담론에 힘입어 이제 많은 이들이 도대체가 개인이 국가에 ‘충성’한다는 발상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자각하게 되어서다.

이 두 사람의 교집합 중 하나는 ‘탈-탈원전’이다. 탈원전을 제대로 시작조차 못했는데 이미 대한민국이 망해가고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일부 언론은 언제나 그렇듯 보도라기보다는 투쟁을 하고 있는 것이니까 논외로 하자. 예비후보들의 입장은 차원이 다른 서글픔을 안긴다. 2011년 일본 원전 사고에서 방사능 누출이 없었다는 윤 후보의 오해가 알려주는 것은 그가 하겠다던 공부가 원전산업의 경제적 효율성에 대한 것이지 그로 인해 일어난(또 일어날) 비극에 대한 성찰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세계 제1의 원자력산업 생태계가 무너졌다”는 최 후보의 일갈 속에서도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이후 인류에게 원전이 갖는 의미에 대해 세계의 석학들이 고뇌한 내용들은 들어설 여지가 없다. 오로지 돈, 돈, 돈뿐이다.

무지는 조롱의 대상이 아니다. 누가 감히 그럴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무지가 무시의 결과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역사적 폭력과 그것이 인류에게 가한 상처에 대한 무신경함, 바로 그것이 나는 무지해도 된다는 자기 관용을 허락한 것이라면 말이다. 120시간 노동 발언은 노동착취의 역사가 남긴 상처에 대한 무시이고, 국민의례에 대한 자부심은 국가가 개인에게 희생을 강요한 국가주의의 불행한 역사에 대한 무시이며, 탈원전의 문제를 산업적 측면에서만 접근하는 것은 원전 사고로 인류가 겪은 비극에 대한 무시다. 이런 무시로서의 무지는 과거와 현재의 모든 피해자들에 대한 폭력이 된다. 우리는 어떤 공부를 해야 하는가. 이제는 나로부터 타인을 지키는 공부의 시간이다. 나의 무지로부터 타인을 보호해야 한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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