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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추구할 권리’라는 말은 감미롭게 들렸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헌법 제10조) 이런 걸 보장해주다니 생각만 해도 든든하다거나 했던 것은 아니지만, 희미하게나마 위로와 격려를 받는다는 느낌은 있다. 그러나 예전에 나는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행복할 권리’와는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듯싶다. 국가가 국민에게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주관적인 것이어서 일일이 보장해줄 수 없다. 당신이 행복을 무엇이라 생각하건, 행복해지기 위한 노력을 돕겠다는 말일 뿐이다. 그래서 ‘행복권’이 아니라 ‘행복추구권’이다.

1776년 미국독립선언서에 처음 사용되긴 했지만 그 개념 그대로 헌법에 명시한 나라는 일본과 한국 정도라 한다. 우리 헌법에는 1980년 개헌 때 처음 도입된 이래 그 의미가 불분명하다는 비판이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헌법에 규정돼 있는 다른 개별 기본권들과의 위상 관계가 모호해서다. 헌법학자들의 입장은 갈린다. 개별 기본권을 아우르는 포괄적 자유권으로 받아들이자는 의견, 또는 다른 기본권과 겹치지 않는 방식으로 그것들을 보충하기 위해 사용하자는 의견, 또는 보다 적극적 해석을 시도해서 이를테면 국민의 최저생계 보장을 국가에 요구할 수 있는 근거로까지 삼아야 한다는 의견 등등. 보수적 학자들은 의미를 축소하거나 다른 개념으로 대체하려 하고, 진보적 학자들은 그것에 더 많은 의미를 집어넣으려 하는 것 같다.

법학적 가치야 없을 일이지만 비전문가인 나도 생각은 해 본다. 행복이란 무엇이며 그것을 추구한다는 것은 무엇인지를. 예컨대 이런 식으로 말이다. 잠에서 깨보니 나는 땀에 젖어 있고 그 상태가 불쾌하다. 가까이 있는 선풍기를 켜면 나의 상태는 바뀐다. 시원해지기 시작한다는 말이다. 땀이 서서히 말라가면서 피부가 깨끗해지고 몸이 가벼워진다는 느낌이 든다. 에어컨을 세게 틀어놓은 카페로 들어가자마자 순식간에 체온이 급강하하는 느낌과는 다르다. 오래된 선풍기 앞에서 나는 기분 좋은 믿음 하나를 갖게 된다. 아직 충분히 시원하지는 않지만, 이미 나는 ‘덥다’에서 벗어나 ‘시원하다’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으니, 문제없이 목적지에 도달할 것이라는 믿음 말이다. 바로 그 순간, 나는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헌법 10조의 행복추구권
내 삶이 더 나아질 것이란 믿음
도착 아닌 도정 ‘미래 완료 시제’
청년 노동자들 암울한 현실 직면
성실한 노력이 결실 맺는 세상을

그러니 행복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믿음이다. 나에게서 진행 중인 개선(改善)이 방해받지 않을 것이며, 결국 나는 지금보다 더 나은 상태에 이를 것이라는 믿음. 행복하다는 기분은 그렇게 행복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라고 믿어질 때 찾아온다. ‘행복함’은 ‘행복해지고 있음’이자 ‘행복해질 수 있음’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행복해?’가 아니라 ‘잘돼가?’라고 묻는다. 행복이 도착이 아니라 도정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생각해 보면 ‘행복추구권’이라는 말은 참 적절해 보인다. 왜 행복할 권리가 아니라 행복을 추구할 권리여야 하는가. 행복을 추구하는 게 곧 행복이므로, 행복해지려면 행복을 추구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행복추구권이라는 말은 있어야 하겠다. 행복에 대한 진실 하나가 거기 담겨 있으므로.

삶은 선풍기 앞에서 땀을 식히는 일로만 살아지는 것은 아니니까 행복의 논리는 더 실천적인 맥락에서 일반화될 필요가 있겠다. 뒤늦게 알았지만 50년 전에 존 롤스가 다 해놓은 일이었다. 그는 행복의 두 가지 요소를 명쾌하게 규정했다. “사람은 합리적인 계획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고 또 그의 노력이 결실을 맺으리라는 합당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동안 행복하다.”(<정의론>, 83절) 근래 알랭 바디우는 ‘만족’과 ‘행복’을 가르고 후자를 뾰족하게 만든다. “행복은 모든 사람이 저마다 만족을 얻는 좋은 사회를 가리키는 추상적 관념이 아니다. 행복은 어려운 과제를 수행할 주체성이다.”(<행복의 형이상학>, 3장) 행복을 추구하는 일은 세계를 바꾸는 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이 급진적 뉘앙스를 감당해야 하는 주체는 개인일까, 국가일까.

모두가 행복할 수 있게, 아니 행복을 추구할 수 있게 하라. 합리적인 계획을 세우고 성실히 살아가는 이들이 삶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믿을 수 있게 하라.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 불리는 현재 시제의 만족 말고, 미래 완료 시제로 작동하는 행복을 누리게 하라. 오늘날 대다수의 청년 노동자는 성실한 노동만으로 행복을 추구할 수 없다. 집을 살 수도, 아이를 기를 수도, 노후를 준비할 수도 없다. 임금으로 추구할 수 있는 것은 1인분의 생존뿐이다. 노동의 가치는 땅에 떨어졌다. 남은 것은 단기적 만족으로 삶을 버텨나가는 ‘항복’의 길과 주식 투자에 미래를 거는 ‘개미’의 길뿐인가. 행복추구권 40년, 이제 행복이라는 말 자체가 복고풍 같다. 그러나 헌법이 보장하는 것은 행복을 추억할 권리가 아니라 행복을 추구할 권리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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