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1980년 5월 광주에 바쳐진 소설 <소년이 온다>(2014)의 독일어판 출간을 앞두고 독일 취재팀이 내한했을 때 작가 한강은 그들과 국립5·18묘지를 방문했다. 무덤들 사이를 거니는 작가를 영상에 담고 싶다는 취재진에게 한강은 다음과 같은 말로 정중히 사양한다. “저는 그냥 한 권의 책을 쓴 것뿐인데요. 저에게는 그렇게 할 자격이 없어요.” 그러나 <소년이 온다>는 그저 ‘한 권의 책’만은 아니다. 2000년대 들어 시작된 5·18 훼손 시도에 준엄한 제동을 걸었다는 점에서 큰일을 했다. 누적 판매량 40만부를 넘겼고 구매자의 80%는 2030 청년들이라고 한다. 이 책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는가. 1985년 이래로 교과서 역할을 해온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개정판(2017)이 잇따라 나왔을 때는 쐐기를 박는 듯해 통쾌하기까지 했다.

이미 몇 번 읽은 <소년이 온다>를 예정된 행사 때문에 다시 읽었다.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리는 제3회 아시아문학페스티벌의 주제는 ‘아시아의 달: 아시아 문학 100년, 신화와 여성’이다. 한승원 위원장의 취지문에는 “아시아의 여성들이 어떻게 야만적인 폭력 속에서 사람이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삶과 평화를 꿈꾸었는가”를 질문하는 대목이 있다. 나는 이 질문이 ‘해방 정치의 주체로서의 여성’을 염두에 둔 것이라 이해했다. <소년이 온다>의 영문판 제목인 ‘인간의 행위’(human acts)는 ‘인간’의 잔인함과 숭고함 모두를 깊이 성찰하겠다는 이 소설의 취지를 드러내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 소설을 ‘여성’의 서사로 읽는 것은 그 취지에 반하는 일이 될까? 그런 독법도 넉넉히 허용하는 면모가 이 소설에 있음을 이번에 알았다.

주요 등장인물인 ‘정미’ ‘은숙’ ‘선주’ 등을 생각해 보면 그렇다. 항쟁 기간 중 실종된 스무 살 정미는 남동생을 공부시키려고 자신은 진학을 포기하고 공장 노동자로 살던 중이었는데, 이는 그 시절 수많은 어린 누나들의 모습 그대로다. 내내 도청 민원실을 지키다 27일 진압 직전에 그곳을 떠난 고3 학생 은숙은 항쟁 이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내내 상처 받으며 살아가야 했던 무명 여성들의 표상이다. 끝까지 도청을 사수하다 상무대로 끌려가 끔찍한 고문을 당하는, 블랙리스트 노동자인 선주는, 유신 말기의 노동운동과 5월 광주 사이의 연결고리로 존재한다. 소설 속에서 이들은 모두 스무 살 전후의 청년이다. 이 소설을 ‘항쟁 주체로서의 청년 여성 서사’라고 규정할 수도 있는 이유다.

물론 이것은 그저 소설적 상상이 아니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와 <광주, 여성>(2012), 그리고 올해 방송된 ‘SBS 스페셜 5·18민주화운동 40주년 특집-그녀의 이름은’의 곳곳에 여성 청년들의 헌신이 기록돼 있다. 5월19일 시작된 전옥주(당시 31세)와 차명숙(19세)의 가두방송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27일 새벽 3시50분, 도청 스피커에서 울려 나온 마지막 방송을 했던 박영순(21세)도 대학생이었다. 젊은 여성이었기에 추가적으로 감내해야 했던 오해와 고문은 40년간 그들을 아프게 했다. 그들은 제 정체성을 당당히 드러내지도, 항쟁 이력에 상응하는 사회적 대접을 받지도 못했다. 그러기는커녕, 전옥주씨는 방송 때문에 희생자가 늘어났다고 자책하며 살았고, 박영순씨는 이름을 바꾼 채 숨어 살아야 했다.

5·18 당시 ‘가두방송’ 여성들
항쟁 이력에 40년간 오해 감내
사회적 대접 못 받은 채 은둔도
이번엔 헌신에 대해 인사해야
고맙다고, 불행해선 안 된다고

역사가 이름조차 기억 못하는 이들도 있다. 다들 알다시피 ‘해방 광주’의 도청 민원실과 상무관은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훼손된 시신을 수습하는 고통스러운 일이 행해진 공간이었다. 역사학자 한홍구는 최근 출간한 <5·18민주화운동>에서 묻는다. “그 많은 시신은 누가 수습했을까요? 시민들 중에서 주로 여고생들이 했다고 합니다. (중략) 대한민국 정부는 그 당시 광주에서 시신들을 수습한 여고생들한테 단 한번도 ‘고맙다’ ‘힘들었지?’ 같은 인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지금이라도 그 말을 꼭 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뒤늦게 <소년이 온다>를 읽었는데, 그 이야기가 나와서 울게 되었다고 했다. 그 이름 없는 어린 여성들에게 한강은 ‘은숙’과 ‘선주’라는 이름을 주었다.

그리고 40년이 흘렀고, 나는 지금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라는 책을 앞에 두고 있다. 어린 여성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집단 성착취 사건인 N번방 범죄를 처음으로 취재하고 세상에 알린 ‘추적단 불꽃’이 쓴 책이다. ‘불꽃’의 구성원은 20대 초반의 두 여성이다. 이들이 지난 1년 동안 해낸 일은 1980년 5월의 저 가두방송을 생각하게 한다. 우연히 알게 된 범죄를 외면하지 못했고, 보복의 두려움을 감내해야 했으며, 피해자들의 참혹한 실상과 반복적으로 대면해야 했고, 여기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고 외롭게 외쳐야 했다는 점에서 말이다. 1980년 5월 도청에서 헌신한 청년 여성들에게 역사가 하지 못한 그 인사를 이번에는 해야 한다. 고맙다고, 그리고 당신들은 결코 불행해지면 안 된다고, 이제는 모두 함께하겠다고 말이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