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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양쪽의 극지처럼, 우리는 반대편에서 서로를 본다. 함께 살 수 없는 북극곰과 남극펭귄처럼, 우리는 다른 세상을 산다. 모두 알다시피 이를 ‘이념적 양극화 현상’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말문을 열면 고고한 양비론을 펼치려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아니다. 불가피하게 양극화될 수밖에 없는 사안들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더 분명한 것은 그렇지 않은 사안들이 더 많다는 점이다. 문제는 이 둘이 구별되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법안과 정책은 언제나 찬반 승부의 대상이 되고 뉴스엔 딱 두 종류의 댓글만 달린다. 2000년대 이후 급격해진 이 현상에 대해선 전문가들의 연구가 많지만, 전문가가 아닌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본다. ‘북극곰과 펭귄이 서로 몰라도 될 것들을 모르는 채로 살았더라면 서로 이렇게까지 미워하게 되었을까?’

인터넷이라는 무한 지면에 의견들이 쏟아진다. 의견은 많을수록 좋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리는 몰라도 되는 것들, 몰라야 좋을 것들까지 알게 된다. 하수처리장을 빠져 나가는 오염수처럼, 의견 속에 섞여 흘러 나가는, 서로를 향한 감정들. 예전에는 내 의견이 타인에게 전달되려면 시간이 걸렸고 그것은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 감정이라는 오염물을 걸러내기 위해서 말이다. 격렬한 감정에 휘둘려 펜을 쥐더라도 한 문장씩 적다 보면 가라앉고는 했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가장 생생한, 그래서 가장 유해한 감정이 즉각 표현된다. 표현(expression)이라는 것이 감정을 밖으로(ex-) 발행하는(press) 속달(express) 서비스라도 되는 것처럼. “디지털 매체는 감정 매체”(한병철, <무리 속에서>)라는 규정도 그래서 나온다.

마치 마음의 소리가 다 들리는 세상이 된 것 같다. 특별히 노력하지 않으면 듣게 되고 만다. 진보가 보수를, 보수가 진보를, 서로 얼마나 혐오하고 경멸하는지. 이것은 충격을 동반한다. 입장을 비판당하는 것과 존재를 거부당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네 의견은 틀렸다’가 아니라 ‘너는 틀려먹었다’이기 때문이다. 전자라면 상대방과 깊은 대화를 나눠볼 마음도 생긴다. 그러나 후자에는 파국만이 있을 뿐이다. 나를 증오하는 사람을, 반작용적으로 증오하지 않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를 싫어하니까 나도 싫어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제는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들에게로 더 가까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사안별로 의견을 달리 갖기보다는 함께 싸워줄 이들과 보조를 맞추게 될 것이다. 북극곰이거나 펭귄이거나.

‘네 의견은 틀렸다’가 아니라
‘너는 틀려먹었다’는 혐오·경멸
마음의 소리가 다 들리는 세상
서로 몰라도 될 북극곰과 펭귄
서로 모르는 채 살았더라면…

1990년대 후반 이후 보수 우익 논객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작가 이문열은 몇 년 전 어느 인터뷰에서 그것이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한 변화였다고 고백했다. 원래부터 진보 진영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심정적으로 동정적이긴 했다고, 그런데 그쪽에서 집요하게 미워하기만 하니까 그 서운함 때문에 더 반대쪽으로 이동하게 되더라고 말이다(<바이오그래피 매거진: 이문열>). 이보다 더 극적으로 돌변하는 사람들, 그래서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이들도 있다. 이견을 제시할 때 품으면 생산적 내부 비판자가 될 수도 있지만, 변절자 혹은 배신자로 낙인찍고 적대시하면 정말 그것밖에는 될 것이 없다. 존재의 정처(定處)가 없이는 불안한 어린아이가 될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이다. 누구든 박수쳐 주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조너선 하이트는 도덕적 판단에서 언제나 직관이 먼저이고 전략적 추론은 그다음이라고 주장하는데(<바른 마음>), 비슷한 취지로 말해보자면, 입장(立場)은 곧 입장(入場)일 수 있다. 서 있기 때문에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들어가기 때문에 서게 되기도 한다는 말이다. 오랫동안 형성된 근본 입장은 안 그래 보이지만, 작은 입장이 생겨나는 과정을 보면 그렇기도 하다. 가까운 이와 논쟁하다 보면, 별 확신 없이 택한 내 입장을 상대방이 지지하지 않을 때, 상대를 이기는 게 목적이 되기 시작하면서 내 입장도 걷잡을 수 없이 강화되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깨닫는 것이다. 나의 ‘옳음’보다 너의 ‘있음’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네가 없는 나의 옳음이 무슨 소용인가 싶을 때, 우리는 문득 얼마나 유연해지는가.

그러나 개인 사이가 아니라 집단 사이가 문제일 경우 상황은 달라진다. 귀담아들을 대목이 있어도 귀는 닫혀서 끝내 열리지 않는다. 나의 옳음이 너의 있음보다 중요하다. ‘너’ 하나 포기해도 ‘우리’는 문제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누군가를 비난하고 배제하면서 이쪽이 더 결속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떠나보낸 이는 서운함과 복수심의 강도만큼이나 맹렬한 적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에서도 피조물은 원래 괴물이 아니었다. 버려지는 순간 괴물이 되었을 뿐. 우리는 서로 몰라도 될 것을 너무 많이 보여준다. 그렇게 매일 서로를 버리고, 매일 누군가로 탄생시킨다. 여기저기 자유롭게 서성이며 만났다 헤어졌다 할 수 있는 독립적 개인 말고, 양극에서만 서식할 수 있는 괴물을, 괴물 집단을.

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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