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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콘서트에 ‘아무말 대잔치’라는 제목의 코너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단어를 즐겨 사용하던 몇몇 이들은 이제 작별을 고할 때가 되었다며 짜증섞인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온라인에서 생겨난 단어, 개념, 유행이 주요 일간지와 지상파 방송에 차용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점심시간에 SNS에서 있었던 논란이 저녁 즈음이면 기사화되고, 예능프로에서는 속보 경쟁이라도 하듯 신조어를 받아들여 남발한다. 이쯤 되니 개그콘서트는 차라리 느긋한 편에 속할 지경이다.

어쨌거나 ‘아무말 대잔치’는 그 제목 만으로 이미 시대의 핵심을 선취한 것으로 보인다. 내가 지난 일주일간 들어야 했던 ‘아무말’만 떠올려 봐도, 대잔치를 넘어 프로리그를 출범해도 손색이 없다. 상임위의 인사청문회에서 지구의 나이가 6000살이라고 믿고 있다는 장관 후보며, 동학농민혁명이 “비폭력 평화 정권교체”의 기원이라는 야당의 대표에다, 대법원장 후보 인사청문회장에서 “성소수자 인정하면 근친상간·수간으로 비화”한다고 말하는 국회의원 등등. 여기에다 SNS를 타고 넘어오는 유명인과 일반인들의 아무말까지 더하면 내가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일종의 저주로 느껴질 정도다.

물론 공사를 막론하고 언어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무너짐은 맞춤법을 “파.괘.”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언어가 말 그대로 무의미해진다는 것에 가깝다. 명연설가로 이름난 고 노무현 전 대통령도 “좌파 신자유주의”같은 기묘한 조어로 이 혼란의 서막을 열었고, MB정부는 기존의 민주화와 사회운동의 가치를 멋대로 도용하여 본래의 뜻과 전혀 상관없는 말들로 만들었다. 박근혜 정부는 침묵만도 못한 말들을 드문드문 내뱉다가 촛불의 심판을 받았다. 오죽하면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대통령이 제대로 말을 한다는 사실이 국민들에게 놀라운 일로 여겨졌을 정도다.

그러나 여전히 공적인 영역에서부터 무너져 내린 말들의 폐허는 점점 커져간다. 여성과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발언을 공공연하게 내뱉고, 가짜뉴스와 비이성적인 색깔론을 도배하는 정치인들은 그 행동에 대해 별다른 책임을 지지 않는다. 언론은 경영난을 탓하며 부채질에 열중하고, 정치인들은 그런 언론에 자기 이름 한 줄을 내보내기 위해 기꺼이 저열함에 타협한다. 책임 있는 이들도 이렇게 행동하는데, 책임도 권한도 없는 이들이 품위를 지킬 이유는 딱히 없다. 논리들이 경합하고 당위가 맞서는 대신에, 모두가 소리 높여 자신의 이야기만 떠들어대는 방언대결이 펼쳐진다. 비판과 분석이 무색해지는 동안, 일침과 사이다라는 이름의 뻔한 얘기가 시끄러운 소음을 더한다.

이 아무말 대잔치를 끝내기 위해서는 국립국어원이 아니라 정치의 책임이 막중하다. 지킬 수 있는 말을 하고, 그것을 지켜내는 실천이 반복되어야 한다. 만에 하나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면 면피나 책임 미루기에 급급할 게 아니라 원인을 분석하고, 재발을 방지해야 한다. 국민들이 마땅히 들어야 하는 말을 건네고,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해야 한다. 악의적인 말과 행동에는 책임이 뒤따라야 한다. 특히 힘 있는 이들일수록 그 책임은 더 커야 한다.

사실 중요한 것은 예측 가능한 뻔한 것들 사이에 있는지도 모른다. 필요한 ‘파격’은 이 뻔한 것들이 사람들에게 신뢰를 돌려줄 수 있다면, 저절로 솟아날 것이다. 외침과 울부짖음 사이의 어딘가에 있는 말들도 의사소통을 위한 말들로 다듬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부디 정치는 아무 걱정 말고 본업에만 충실해주길 바란다. 예능정치의 조기종영을 손 모아 기원한다.

<최태섭 문화비평가 ‘잉여사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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