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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지인이 옆 사무실에 출판사를 차렸다. 이름을 ‘바틀비’로 지으려 한단 얘기를 들으니 ‘필경사’에 대한 예전의 궁금증이 떠올랐다. 필경(筆耕)이란 다른 사람의 글을 옮겨 적는 필사를 직업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 <모비딕>으로 유명한 허먼 멜빌의 단편소설 속 등장인물인 바틀비의 직업이 필경사였다.

작중 그의 행동이 특이함에도 작가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래서 다양한 해석들이 나오는데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으로 풀어가는 경우도 있고, 작중인물들을 분석하여 사무직이 등장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한 ‘새로운 병증’에 대해 고찰하는 경우도 있다. 주거문제에 관심이 많은 사람에게는 ‘당시 뉴욕의 월세는 소득에 비해 얼마나 비쌌을까?’라는 궁금증을 품게 한다. 바틀비는 사무실에서 기거하는 홈리스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일하던 변호사 사무소에서는 필경사들에게 100단어당 4센트를 지불하였다고 한다. 평균적으로 5초에 1단어를 쓸 수 있다고 가정하면 필사 6시간 정도를 가정하여 하루에 2달러 정도 벌었을 것이다. 한 달 꼬박 일하면 50달러 정도 벌 수 있는 셈이다. 하지만 바틀비는 “나는 그 일을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어”라면서 창밖의 벽을 보며 백일몽에 빠져드는 것이 일상이었으므로 훨씬 수입이 적었을 것이다.

19세기 중반 뉴욕에서 제일 저렴한 하숙비는 한 달에 15달러 정도였다는 기록이 있다. 필경사로 쉬지 않고 일해서 벌 수 있는 소득의 30%에 해당한다.

소득대비임대료(RIR·Rent to Income Ratio)가 25%를 넘어가면 주거비 부담이 무겁다고 본다. 필경사는 아무리 노력해도 가장 질이 낮은 하숙방도 어렵게 구해야 하는 처지였던 셈이다. 그가 사무실을 거처로 삼는 게 어쩌면 당연하다.

주변을 둘러보면 집이 아닌 사무실, 공장 구석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고시원이나 찜질방 신세를 지는 경우는 너무 흔하다. 찜질방도 이용하기 어려우면 결국 노숙을 하게 된다. 이런 사례들이 늘어나는 이유는 소득에 비해 주거비용이 높기 때문이다. 80만원 남짓 벌어 40만원짜리 고시원에서 지내는 경우도 있다. 사회보장제도나 주거복지라는 개념도 없었던 19세기 뉴욕과 다를 바 없는 우리의 상황이 씁쓸하기만 하다.

몇 년 전부터 이런 주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민사회와 여러 지자체에서 주목하고 있는 대안이 사회주택이다. 당사자들이 힘을 모아 스스로 주택을 마련해보자는 움직임이다. 지난 10년간 정부가 주거문제 해결에 무관심했던 것에 대한 자구책이다. 여러 주택협동조합이 결성되는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당사자만의 힘으로 주거문제를 해결하는 게 쉽지 않다. 지자체에서 ‘사회주택조례’를 만들어 지원을 하는 경우도 있으나 좀 더 효과적으로 다듬어 나갈 필요가 있다.

현재 서울주택도시공사에서 공사 차원에서 적극적인 지원을 할 수 있는 사회주택모델을 만들기 위한 연구용역을 진행 중이라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으나, 공공임대 사업에 사회주택 개념을 연계하여 공동체와 수요자가 직접 건설에 참여하고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주택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공동체를 중심으로 건설되고 관리되는 사회주택이 실현되면 현장의 여건과 주민의 목소리를 반영한 도시재생을 이루는 주요 수단이 될 수 있다.

바틀비가 사무실에서 기거하는 걸 알게 된 변호사는 사무실을 옮긴다. 거처를 잃고 부랑자가 된 바틀비는 교도소에서 곡기를 끊고 생을 마감한다. 만약 사회주택에서 서로 소통하고 아옹다옹하기도 하며 생활하였다면 그도 태도를 바꾸고 삶을 이어가지 않았을까? 쉽지 않지만 사회주택을 포기하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이다.

<강세진 | 새로운사회를여는 연구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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