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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가 너무 무서워서 TV를 꺼버렸다.” 요즘 주변에서 들은 얘기다. 공포 드라마가 아니다. 자녀를 서울대 의대에 보내려고 혈안이 된 상류층 부모들의 이야기를 담은 JTBC 드라마 <SKY 캐슬> 얘기다. 이 드라마의 인기는 신드롬에 가깝다. 방송이 끝날 때마다 온·오프라인이 시끌시끌하다. 2~3명만 모여도 침 튀기며 이야기를 쏟아낸다. 최근엔 방송 전 게시판에 올라온 드라마 내용이 실제 방송과 일치하자 ‘내용이 유출된 것 아니냐’는 논란까지 일어났을 정도다. 급기야 제작사 측이 “시청자분들께서 다양하게 추측한 내용이 우연히 맞아떨어진 것일 뿐, 제작진 유출이 아니다”라는 공식 해명까지 내놓았다.

이 드라마가 섬뜩한 것은 자녀의 입시경쟁에 물불을 가리지 않는 부모들, 성공보수로 강남 집 한 채 값을 대가로 받는 입시 코디네이터의 존재, 이들의 광기에 짓눌려 불행을 맞는 아이들의 적나라한 얘기가 단지 드라마 속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눈치채고 있기 때문이다. 여느 드라마였다면 빈번한 자살, 복수, 자극적인 장면 등으로 욕깨나 먹었을 것이다.

배우 염정아가 출연한 'SKY캐슬'의 한 장면

그러나 <SKY 캐슬>은 작가의 세밀한 취재가 바탕이 됐다는 사실 아래 대치동 입시학원 강사, 교육 전문가, 정신의학 전문의까지 다양한 실제 경험담과 분석을 내놓으며 드라마 인기를 추동하고 있다. 덕분에 다음주 종영을 앞두고선 케이블 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경신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마저 높이고 있다. 사람들이 그토록 궁금해하는 드라마와 실제의 간극은 얼마나 될까.

여기 또 다른 ‘캐슬들’이 있다. ‘만 3세, 영어로 중국어 가르칠 베이비시터 구함. 한국말 하면 절대 안됨. 시터시간 길면 길수록 좋음. 시급 2만5000원’ ‘27개월 여아, 영어로만 얘기하며 놀아줄 분 구함’…. 베이비시터를 구하는 사이트 등에서 볼 수 있는 조건이다. 아직 우리말로도 의사소통이 자유롭지 못한 아이는 매일 영어로 중국어를 가르치려 드는 베이비시터를 만나야 한다. 아이 엄마가 지켜보는 동안 베이비시터는 아이의 감정상태나 이해도와는 무관하게 앵무새처럼 영어와 중국어를 끊임없이 쏟아낸다. 아이 엄마는 임신하자마자 유명 영어유치원에 등록을 걸어뒀다. 겨우 입학한 유치원에서 아이가 동시 진행되고 있는 중국어 시간을 못 따라갈까봐 늘 불안하다. 집에서도 복습과 선행을 게을리할 수 없는 이유다.

이렇게 자란 아이는 계속해서 과외와 학원에 내몰리며 살벌한 경쟁을 치를 것이다. 대치동 등 유명 학원가에는 청소년 정신상담소나 정신건강의원 등이 성황을 이룬다. 입시학원에선 불안을 느끼는 학생들을 곧장 연결해줄 정신건강 전문의 리스트를 갖고 서비스에 만전을 기한다. 한 유명 논술학원 원장은 불황을 모른다. 해마다 불수능이든 물수능이든 상관없다. 어차피 수험생들은 그 안에서 피 터지는 경쟁을 피할 방법이 없으니까. 바늘구멍을 통과하듯 족집게로 소문난 논술학원에 어떻게든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몇 년째 문전성시를 이룬 논술학원 원장은 결국 돈을 굴릴 금융사까지 인수한다. 어느 일타강사는 몇백억원에 달하는 빌딩을 사들였다. 드라마 얘기가 아니다. 이쯤되면 <SKY 캐슬>의 무엇이 허구이고 현실인지 구분 자체가 의미 없는 것 아닐까.

얼마 전 들었던 얘기가 떠오른다. 전남 해남에는 아름다운 사찰 미황사가 있다. 그곳에선 여름과 겨울 방학이면 초등학생 4~6학년이 참가하는 한문학당이 열린다. 서울, 부산 등 대도시에서 온 아이들이 많다. 천주교, 기독교 등 자신의 종교와 상관없이 자유롭게 참가한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예불을 드리고 명상하며 마당을 쓸고 잡초를 뽑으며 울력을 한다. 한문학당인 만큼 불경에 나오는 한문을 깨우치는 수업도 한다. TV, 게임기는 고사하고 휴대폰도 사용할 수 없다. 발우공양을 하며 반찬투정은커녕 밥 한 톨 남기지 못한다. 밤 9시는 무조건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 까다롭고 엄격한 규칙이 아닐 수 없다.

자발적으로 참여한 아이들이라지만 요즘 애들이 감당하기 힘들지 않을까. 그런데도 모두들 좋아한다고 한다.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그중 어느 아이가 했다는 말이 잊히지 않는다. “여긴 평화로워서 좋아요.” 내전 상황도 아닌데 ‘평화’라니…. 그것도 고작 열살 남짓 아이들이 갈구하는 것이 평화다. 아이들은 한문시간, 명상시간 때때로 평화롭게 졸 것이다. 해 질 녘엔 달콤한 유자차 찻잔을 들고 벗과 함께 절간 담장에 기대서서 붉게 타올랐다가 서서히 사그라드는 노을을 바라본다. 한문학당을 마치고 아이들이 돌아가는 곳이 어른들과 사회가 만들어놓은 전쟁터가 아니길 바랄 뿐이다.

<김희연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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